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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이상억 교수 '서울의 한옥'펴네 [중앙일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0-05
조회
67
1998.10.27 00:00 | 종합 40면 PDF인쇄기사 SNS 공유 더보기
삭막한 도시생활 중에도 고향 서울을 또렷이 기억하며 오늘에 살려내는 이가 있다.
서울 토종 이상억 (李相億.54.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그가 회상하는 고향의 얼굴은 증조부때부터의 향기가 온전하게 전해지는 그의 옛집 한옥이다.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이승업 (李承業) 이 지은 광교 근처 삼각동 한옥에서 태어나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낸 그. 도시화의 바람에 밀려 그 한옥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이제 '남산골 한옥마을' 의 문화재로 남았지만 이교수의 '한옥사랑' 이 이제 한 결실을 맺었다.
그 한옥을 세세한 기록으로 재현한 '서울의 한옥' 이 그것 (한림출판사刊) .한옥의 이모저모뿐 아니라 이교수의 부모가 살았던 1930~40년대 생활상을 함께 아우른다.
그 집을 그리며 그 시절로 진정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교수와 한옥의 인연은 증조부가 이승업이 경복궁 중수에 쓰던 자재를 가져다 지어 10여년을 살았던 이 한옥으로 이사하면서부터. 그 후 4대가 살았다.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뒤채.사랑뒤채.행랑채가 오밀조밀 자리한 이 한옥은 제각기 크기가 다른 지붕의 박공 (공 : 지붕밑 측면에 팔 (八) 자 모양으로 붙인 널) 과 박공벽에 쌓아올린 회색 벽돌, 선반을 받치는 까치발의 현란한 조각, 비례가 완벽한 나지막한 난간 등 무엇하나 나무랄 데 없는 집이다.
서울시 문화재위원인 김홍식 (金鴻植) 명지대교수는 "70년대 처음 이 한옥을 본 후 너무 아담하고 아름다워 몰래 사모하는 마음까지 생길 정도였다" 고 말한다.
남산한옥골로 옮겨진 이 집을 둘러보며 이교수는 이 한옥과 고종황제에 얽힌 일화를 들려준다.
대문이 솟을 대문이라 멀리서도 높직이 눈에 띄었던 게 이 집의 특징. 당시 높은 집이 없을 때라 한옥이 덕수궁에서 빤히 내려다 보였다.
궁중에서 밖을 보시던 황제가 "저 여염집 대문은 왜 저리 높은고" 하며 힐책했다는 것. 그래서 이 대문은 보통보다 이렇게 훨씬 낮아졌단다.
또 이런 구조 탓에 비가 오면 마당에 물이 많이 고이곤 했는데 6.25때 옆 동네에 화재가 났을 때 펌프로 고인 물을 퍼, 불을 껐던 일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이교수의 기억을 명징하게 해주는 것은 그때의 사람들과 생활이다.
특히 제사나 생일잔치 때 다락과 광에서 그릇과 기구들을 꺼내는 일은 안주인과 찬모 (饌母).하녀들이 맡았고 장보기는 아낙네들이 밖에 나갈 생각도 못할 때라 사랑의 서사 (書士)가 일하는 아범들을 데리고 지게로 가득 장을 봐줬다.
조리가 시작되면 그야말로 온 집안은 '활기' 와 '법석' 이 하나가 돼 한옥을 무대로 장중한 교향악이 펼쳐진 듯 했다.
빨래는 보통 간단한 것은 집에서 해도 무명빨래들은 모아서 날을 잡아 봄.가을로 자하문 밖 세검동으로 향한다.
이날은 하인들과 아이들의 축제일. 새벽같이 아범이 지게로 솥과 방망이.점심거리를 챙기고 여인들이 뒤따라 빨래거리를 나누어 다같이 이고 진다.
세검정 바윗가에서 날이 저물도록 빨래를 하다 하인들끼리 눈이 맞기도 하고 아이들은 송사리와 가재를 잡고 놀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자신의 경험 혹은 부모로부터 들은 얘기를 하나씩 들려주던 이교수는 가끔 눈을 지그시 감는다.
바닷가나 산이 고향인 이들이 그 곳을 회상하듯. 이런 탓에 남산한옥골을 자주 찾는 그는 자칫 삭막해 보일 수 있는 고향 서울의 기억을 그의 책 '서울의 한옥' 에서 잘 복원해 내고 있다.
신용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서울대 이상억 교수 '서울의 한옥'펴네
삭막한 도시생활 중에도 고향 서울을 또렷이 기억하며 오늘에 살려내는 이가 있다.
서울 토종 이상억 (李相億.54.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그가 회상하는 고향의 얼굴은 증조부때부터의 향기가 온전하게 전해지는 그의 옛집 한옥이다.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이승업 (李承業) 이 지은 광교 근처 삼각동 한옥에서 태어나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낸 그. 도시화의 바람에 밀려 그 한옥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이제 '남산골 한옥마을' 의 문화재로 남았지만 이교수의 '한옥사랑' 이 이제 한 결실을 맺었다.
그 한옥을 세세한 기록으로 재현한 '서울의 한옥' 이 그것 (한림출판사刊) .한옥의 이모저모뿐 아니라 이교수의 부모가 살았던 1930~40년대 생활상을 함께 아우른다.
그 집을 그리며 그 시절로 진정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교수와 한옥의 인연은 증조부가 이승업이 경복궁 중수에 쓰던 자재를 가져다 지어 10여년을 살았던 이 한옥으로 이사하면서부터. 그 후 4대가 살았다.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뒤채.사랑뒤채.행랑채가 오밀조밀 자리한 이 한옥은 제각기 크기가 다른 지붕의 박공 (공 : 지붕밑 측면에 팔 (八) 자 모양으로 붙인 널) 과 박공벽에 쌓아올린 회색 벽돌, 선반을 받치는 까치발의 현란한 조각, 비례가 완벽한 나지막한 난간 등 무엇하나 나무랄 데 없는 집이다.
서울시 문화재위원인 김홍식 (金鴻植) 명지대교수는 "70년대 처음 이 한옥을 본 후 너무 아담하고 아름다워 몰래 사모하는 마음까지 생길 정도였다" 고 말한다.
남산한옥골로 옮겨진 이 집을 둘러보며 이교수는 이 한옥과 고종황제에 얽힌 일화를 들려준다.
대문이 솟을 대문이라 멀리서도 높직이 눈에 띄었던 게 이 집의 특징. 당시 높은 집이 없을 때라 한옥이 덕수궁에서 빤히 내려다 보였다.
궁중에서 밖을 보시던 황제가 "저 여염집 대문은 왜 저리 높은고" 하며 힐책했다는 것. 그래서 이 대문은 보통보다 이렇게 훨씬 낮아졌단다.
또 이런 구조 탓에 비가 오면 마당에 물이 많이 고이곤 했는데 6.25때 옆 동네에 화재가 났을 때 펌프로 고인 물을 퍼, 불을 껐던 일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이교수의 기억을 명징하게 해주는 것은 그때의 사람들과 생활이다.
특히 제사나 생일잔치 때 다락과 광에서 그릇과 기구들을 꺼내는 일은 안주인과 찬모 (饌母).하녀들이 맡았고 장보기는 아낙네들이 밖에 나갈 생각도 못할 때라 사랑의 서사 (書士)가 일하는 아범들을 데리고 지게로 가득 장을 봐줬다.
조리가 시작되면 그야말로 온 집안은 '활기' 와 '법석' 이 하나가 돼 한옥을 무대로 장중한 교향악이 펼쳐진 듯 했다.
빨래는 보통 간단한 것은 집에서 해도 무명빨래들은 모아서 날을 잡아 봄.가을로 자하문 밖 세검동으로 향한다.
이날은 하인들과 아이들의 축제일. 새벽같이 아범이 지게로 솥과 방망이.점심거리를 챙기고 여인들이 뒤따라 빨래거리를 나누어 다같이 이고 진다.
세검정 바윗가에서 날이 저물도록 빨래를 하다 하인들끼리 눈이 맞기도 하고 아이들은 송사리와 가재를 잡고 놀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자신의 경험 혹은 부모로부터 들은 얘기를 하나씩 들려주던 이교수는 가끔 눈을 지그시 감는다.
바닷가나 산이 고향인 이들이 그 곳을 회상하듯. 이런 탓에 남산한옥골을 자주 찾는 그는 자칫 삭막해 보일 수 있는 고향 서울의 기억을 그의 책 '서울의 한옥' 에서 잘 복원해 내고 있다.
신용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서울대 이상억 교수 '서울의 한옥'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