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와 한국문화

ANTHOLOGY

촘스키의 언어 혁명

Author
관리자
Date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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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Noam Chomsky)라면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상식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인 것 같다. 대체로 그의 공식적인 직업은 언어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한편 과격파 인사로서 월남전 반대 운동 등에 앞장섰던 풍모도 간과해서는 그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없겠다. 한창 반전(反戰) 데모가 극에 달했을 때 그는 작가 노만 메일러와 함게 같은 감방 친구가 됐고, <지식인의 책임>(The Responsibility of Intellectuals)이란 에세이도 쓴, 급진적 사상의 주창자요 실천가다. 월남이 공산 세력 수중에 들어간 직후, 하버드 대학의 아시아 학생회에서 주최한 한 저녁 모임에 그가 연사로 나와 득의에 가득 찬 일가견을 펴던 일을 직접 참관한 필자는 MIT에서 그의 언어학 강의를 듣던 때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접했었다. 몇 년 몇 월의 조약이나 성명(聲明)을 인용해 가면서 자기의 소견을 피력하는 그의 진지한 관심과 열성은 정치학 교수와 조금도 진배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대학의 정치학 강의도 여기(餘技)로 맡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이나 영향력이 끼친 분야는 언어학을 빼놓고는 역시 철학, 심리학, 생리학, 교육학, 영어 영문학 등등의 광범위한 비정치적 영역일 것이다. 소위 촘스키의 혁명이 언어학에서 시작된 시점은 1957년 그의 <통사구조>(Syntactic Structure)란 첫 번째 책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구조주의(Structuralism)가 반세기 가량이나 풍미하던 미국 언어학계에 소위 변형 생성 문법(變形 生成 文法)의 이론을 처음 수립해 내놓은 것이다. 철학자 굿 맨(N. Goodman) 및 언어학자 해리스(Z. S. Harris) 교수의 제자로 필라델피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하버드 대학의 연구원으로도 있었고, MIT에 간 뒤 모리스 할레( Morris Halle) 교수와 함께 가장 명성이 있는 언어학과를 육성 발전시켜 나오는 데에도 그의 학문적 비중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의 혁명적 언어관이 이같이 성공적으로 학계에 발붙이게 된 사례(事例)는 쿤(T.S. Kuhn)의 <과학적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Revolutions)란 책의 주장에 잘 들어맞는 경우로 흔히 지적된다. 즉 과학상의 진보는 인내와 각고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던 종래의 관점을 반성하고, 과학상의 변화도 낡은 방식과 새로운 방식간의 갈등을 통해 ‘혁명적’ 과정을 겪어 한 방식이 지배적인 존재로 자리를 굳힌다고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학문상의 혁신은, 패배자는 생존키 어려운 정치 혁명과는 다르다. 만약 구체제나 방식이 새로운 기술이나 데이터의 축적을 처리해 내지 못할 때, 그 학술 분야는 위기의 시기를 겪으며 비정상적 부조리를 해결해 내는 길을 모색케 되고, 대체로 젊은 과학자 또는 신참 국외자(局外者)가 이 일을 이끌게 됨이 상례인 것이다.

러시아에서 망명 온 중세 히브리어 학자인 아버지의 권유로 언어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그는 1953년경부터 해답보다는 문제를 더 제기하고 마는 종래의 방식을 제쳐 놓고, 한 언어의 모든 가능한 문장을 다 생성해 낼 수 있는 일련의 규칙의 체제를 가정하고 나섰다. 그는 틀에 박힌 언어학 강의를 받기 이전에 아버지와 해리스 교수 등의 원고 교정일을 하는 계기를 통해 언어를 새로운 안목으로 보는 바탕을 쌓았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비정규적 궤도로 접근해 들어온 것이 오히려 그에게 언어학상의 혁명을 가능케 한 여건이 된 셈이다. 물론 그도 50년대 초 몇 년은 구조주의의 방법을 더 개발시키기 위한 작업에도 종사했으나, 1955년 그의 900여 페이지에 걸친 박사 논문 <언어이론의 논리적 구조>(The Logical Structure of Linguistic Theory), 특히 ‘변형 분석’ (Transformational Analysis)이란 부분에서 이미 새 이론의 싹을 보였다. 이 논문은 그가 1958-59년간 프린스톤 대학에 있을 때 개고(改稿)를 시작했으나, 언어학상의 수리적(數理的) 모형에 새로운 관심이 쏠려, 출판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수학적 작업은 후일 그가 가령 사회 과학에서 컴퓨터를 남용한 데 대한 비판을 펼 때, 그의 직접 체험이 있었다는 이유로 더 신빙성 있는 주장이 되게 하였다.

한편 할레 교수의 권유로 언어학사에 대한 관심도 가져서 1966년 란 책을 내놓았다. 데카르트나 훔볼트 같은 이성론(理性論者)의 언어관을 자기의 원류(原流)로 삼고, 경험론자들을 반박하기 위한 철학적·심리학적·사회 과학적 성찰을 술회하고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 행동주의 심리학 등이 경험론에 바탕을 두고 인간 언어도 경험·훈련·습관·과거 체험에서의 유추(類推) 등에 의해서만 창조적 국면을 발전시켜 나간다고 보는 데 대해, 촘스키는 만약 언어가 습관의 체계라면 과연 반복적인 습관이 어떻게 새로운 개신을 가져올 수 있는가 반문한다. 그러므로 그는 언어가 감각, 경험 등과는 관계없이 마음 속 깊이 이미 타고날 때부터 내재하는 보편적 사실이라고 인식하려 한다. 구조 언어학은 언어가 특정 자극에 의해 발화(發話)되는 소리라고 보는 반면, 촘스키는 새 상황에 대한 반응과 사고의 자유로운 표현 수단으로 본다. 가령 우리가 ‘언어는 코끼리에게는 사색을 위한 양식이 되지 못한다’라는 문장을 전에 접한 일 없이 지금에야 처음 들었지만 곧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은, 습관·연상·조건화 등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분명히 우리는 과거에 직접 경험한 것 이상의 문장을 알아 들을 수 있다는 진실을 웅변한다.

촘스키는 또한 어린이들이 부모들에게서 퍽 산만하고도 단편적인 데이터를 받아들여서 무슨 문장이라도 생성해 낼 수 있는 풍부성을 지니게 되는 사실을 주목한다. 따라서 그는 언어의 문법 이론이 올바른 문장의 생성 규칙만 포함할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어린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에 대한 설명도 기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17세기의 데카르트 같은 이성론자가 본유적(本有的) 아이디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본 것과 일맥상통하는 관점이다. 경험에서 유발되기 이전의 지식, 경험으로 얻어지는 모든 지식을 형식화할 수 있는 본래 주어진 지식을 인간이 가졌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로크나 흄 같은 18세기의 경험론자로부터 현대의 행동주의 학습 이론가들까지는 인간의 마음을 소위 백지상태(tabula rasa)라고 보아 경험하기 이전엔 아무 지식도 존재하지 않고 경험에서만 지식이 유발되는데 그 형식에 대해 제한하는 존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모국어를 구태여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히 배워 쓰며,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경험도 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므로 어떤 보편적 문법이 뇌의 일부에 유전되는 것으로 봐야 타당할 것이다. 촘스키는 좀더 야심적인 구상(構想)으로서, 어린이는 어떤 인간언어든지 습득해 낼 수 있는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적 능력을 지녔다고 믿는다. 즉 각 언어는 공통된 기반을 가졌고 그 기저(基底) 구조의 유사성을 밝히는 것이 그의 관심사다. 표면상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인간 언어라면 대개 구절구조 규칙(phrase structure)과 변형(transformation) 규칙을 가진다. 후자는 표면 구조와 심층 구조를 상호 연관시키며, 표면구조는 다시 음운 규칙에 의해, 또 심층 구조는 의미 규칙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촘스키는 체계화한다.

가령 ‘John is easy to please’와 ‘John is eager to please’란 두 문장은 종래의 구조 문법 체제로라면 ‘주어-계사(繫辭)-형용사-부정사(不定詞)’라고 똑같이 분석될 것이다. 그러나 변형 문법의 관점에서는 두 문장이 전혀 다른 심층 구조로부터 유도되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즉 동사 please에 대하여 첫째 문장에서는 John이 직접 목적어의 기능이나 둘째 문장에서는 주어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명사구화도 둘째 문장만 허용된다: John's eagerness to please. 또 한 예로 ‘the shooting of the hunters’란 구절이 주어질 때 구조 문법에서는 그 애매성을 적절히 밝힐 수 없었지만, 변형 문법에선 hunters가 shoot란 동사에 대해 주어인 경우와 목적어인 경우로 두 가지 의미 해석이 되는 사실을 두 다른 심층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사냥꾼이 쏜 것인가 또는 누가 사냥군을 쏜 것인가가 구별되어야 한다. 비슷한 예로 ‘나는 그 여자의 요리를 좋아한다’라는 평범한 문장도 꼬치꼬치 따져 보면, ‘나는 그녀가 요리해 놓은 그 내용 자체를 좋아한다. 나는 그녀가 요리한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나는 그녀의 요리 방식을 좋아한다. (심지어는) 나는 그녀를 통째로 요리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등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경우를 촘스키는 구조적 애매성 (syntactical ambiguity)이라 하여 어떤 통사 이론의 우열을 테스트할 수 있는 좋은 예로 삼는다. 이들 애매성은 결코 단어 자체들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며, 평범한 단어들이 모였을 뿐이지만, 통사 구조적인 문제점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 표면 구조는 ‘나는 그녀의 요리를 좋아한다’ 하나지만 여러 가지의 다른 의미를 가진 심층 구조들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구조 언어학에선 간과해 왔던 것이다.

촘스키의 또 한가지 공적이라 하면 인간 언어는 무한한 수의 문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동물들의 의사 소통 기호는 제한된 수를 가진 것에 비해, 인간은 이제까지 한 번도 똑같이 말해 보지 않았던 말을 아무 때고 할 수 있고 또 알아 듣는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채집된 언어 자료의 집적(集積, corpus)만을 놓고 분류·귀납·정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나, 변형 문법은 훨씬 더 포용력 있는 연역적 이론으로서 자연 언어의 가능한 문장만을 모두 생성해 낼 수 있는 문법 규칙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 아무리 미 국회 도서관의 모든 장서에 쓰인 문장을 다 집적해 놓는다 해도 인간 언어의 무한히 가능한 문장 수에 비하면 정말 적고도 적은 양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자가 실제로 다루는 대상은 몇 개의 임의적 예문, 즉 언어수행(linguistic performance)에 그쳐서는 안 되며 결국 화자(話者)의 언어에 대한 내재적 지식, 즉 언어 능력(linguistic competence)을 목표로 해야 한다.

다음은 문장 구성을 설명할 수 있는 문법 규칙을 수립하는 데 있어, 과연 어느 이론이 더 우수한가를 평가하는 절차를 촘스키는 제안했다. 종래 구조주의 방법은 단지 문법 규칙의 발견을 전제하며 그 이론 자체가 옳은 문법을 산출해 냈는가 아닌가를 가늠할 여지도 없는 독선적인 것이었다.

촘스키는 그의 이론을 세상에 내놓은 초기에 Robert Lees, Paul Postal 같은 동조자를 얻었고 McCawly, Lakoff, Ross, Perlmutter 같은 제자들이 이어 나왔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이 새 이론의 제창자가 그의 정력을 본래 이론의 방어와 수정에 바치며, (1964), (1965), (1966) 등의 책을 출간하면서, 반론에 대해 일종의 회답을 꾀하는 동안 그의 제자들은 60대 후반부터 촘스키 이후(Post- Chomsky) 시대를 열기 시작하여 소위 생성 의미론(Generative Semantics)의 윤곽을 잡아 갔다. 이에 촘스키도 Jackendoff 같은 더 젊은 제자를 키워서 소위 해석 의미론(Interpretative Semantics)이라는 주장으로 맞섰다. 양 이론간의 큰 차이는 의미 해석(semantic interpretation)이 문법 전체 중에서 어디에 얼마만큼 관여하는가에 있다. 촘스키가 란 책에서 의미부는(semantic component)는 심층구조에만 관여된다고 보던 표준이론(Standard Theory)을 수정하여 Deep Structure, Surface Structure, and Semantic Interpretation(1970)이란 논문에선 표면 구조로부터의 정보도 의미부에 관계된다고 확대 표준 이론(Extended Standard Theory)을 제안한 것이 곧 해석 의미론이다. 이에 비해 생성 의미론은 심층 구조를 따로 세우지 않고 어휘부(Lexicon)와 문법 규칙들이 직접 의미 표현 (Semantic representation)에 관계된다고 본다.

이 양 진영간의 논전은 명확히 판정이 난 것도 아닌 상태로 현대 언어학은 새로운 이슈를 찾아 또 방황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 생성론에 속하는 교수들 밑에서 배우면서 촘스키는 이미 세월이 다 간 사람처럼 들었었으나, 75-77년간 하버드 대학에 가 있는 동안 MIT 강의도 들었을 때 보면, 역시 그의 강의실에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변적(思辨的)인 달변으로 강의실을 압도해 나가는 솜씨는 확실히 범인(凡人)은 아님을 체감(體感)케 했다. 근년에는 다작(多作)은 아니지만 할레 교수와 함께 쓴 (1968)란 음운론에 관한 중요한 저서가 있고, (1968)란 강연집도 있고, 또 꽤 두꺼운 (1975)란 박사논문 책에서 통사론, 언어의 구조, 언어 철학, 문법 이론 등에 관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끝으로 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마무리를 한다면, 결국 그는 20세기 전반에 모든 과학이 너무나 행동주의적, 기계적인 데 치우친 것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큰 흐름을 타고 정신주의적(mentalistic)인 연구 방법으로 언어학 및 여타 관여 학문의 방향을 선회시킨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킨너와의 논전에서도 ‘자극-반응’만을 놓고 따지는 표면적 관찰보다 인간의 본유한 능력에 대해 질문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귀결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 현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양심있는 지식인으로서 그것도 매우 혁신적인 사고 방식으로 구체제를 반성해 보려는 혁명적 사상가로서, 비록 극단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모두 그의 인간성과 부합하는 언행일치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월간 독서 197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