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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LOGY

터키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와 석굴

Author
관리자
Date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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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현재 터키 공화국이 자리잡고 있는 소아시아 반도 동부지역에 평균 900개 이상의 산지로 된 땅이 카파도키아(성경에는 갑바도기아, Cappadocia)다. 양과 말이 많이 생산되며 옛날 히타이트 시대부터 중앙아시아와 흑해를 잇는 무역로도 통과하였고 AD 17년 티베리우스에 의해 로마 영토가 된 이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유적지가 되었다.

원래 이 지역은 많은 문명이 교차한 곳으로서, 원시 동굴 생활자들이 특히 현재의 네브쉐히르(Nevsehir) 근처의 괴레메(G reme) 계곡의 응회암이라는 연한 화산석이 파들어가기 쉽다는 사실을 알았다. 뾰족한 봉우리들과 절벽 및 지하에 인조 석굴을 파서 덥고 추운 이 지역의 기후를 이겨냈고 과일과 곡식들을 저장하기도 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옛날에 폭발한 에르제스화산 기슭 해발 1,200m쯤에 돌기둥과 침식된 절벽으로 된 반경 60km의 지역에 화산 활동으로 용암층과 화산재가 주기적으로 쌓여 그 중 재는 쉽게 깎여 나가고 용암 부분이 버섯의 원추형 갓처럼 맨 위에 남게 되었다. 이런 광경은 지구상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기괴한 느낌을 준다. 지난 8월 이스탄불 근처를 강타한 지진이 이곳에도 일어난다면 이 모습들이 많이 손상될 염려도 있다. 터키는 유라시아, 아라비아, 아프리카 지판(地板)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있어 자고로 지진이 많았다. 에페소, 갈라디아 지방 등의 고대 유적들이 대개 붕괴된 돌무덤으로 남은 것도 그 결과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200여 년간 피신을 해와 3, 4세기부터는 포교를 위해 많은 교인이 거주했다. 6세기 후반부터 페르시아와 이슬람 교인들의 침공을 받자 동굴을 더욱 깊이 파 지하도시, 동굴교회 등을 건설하게 되었다. 동로마제국이 시작된 395년 이후 비잔틴시대 그리스도교인들이 이곳에 각종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석굴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는 9세기 후반 것들이다.

괴레메 지역에 약 30여 암굴교회가 남아 있어 야외박물관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교 순례지가 되어 있다. 국교로 된 뒤 점차 변색 타락한 면을 반대하여 경건한 수도원 생활을 위해 일년 365일에 해당하는 365개의 암굴교회를 지었었다 한다. 8∼9세기경 성상파괴주의(Iconoclasm)가 풍미했을 때, 교회 속에 성상장식을 금했기 때문에 성화파들은 이곳에 피신·은둔하여 주변의 붉은 황토로 물고기, 포도, 사슴 등의 상징적 표현에서 십자가, 인물까지 그리게 되었다.

원추형으로 솟은 바위산을 뚫은 동굴 속은 교회뿐만 아니라 생활공간도 있어 부엌, 식당, 침실 등에 각종 살림살이가 놓였었고, 지금도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곳도 있으며 레스토랑, 호텔로 쓰는 곳도 있다. 외부 침입을 피하기 위해 바위산들 밑에 지하도로도 연결되어 있다.

한편 지하에는 아예 작은 도시가 형성된 지역이 있어 카이마클르(Kaymarkloo), 데린쿠유(Derinkuyu)가 공개되어 있고 오즈코낙(Ozkonak)도 발굴되어 있다. 이들은 깊이 8∼11층으로 괴레메 동굴들보다 규모가 크고 지하에 있는 것이 다르다. 데린쿠유는 지하 120m까지 내려 가지만 8층까지만 공개되며 1, 2층은 동물 사육장 그 밑은 공동 부엌, 곡물저장소, 우물, 침실, 교회, 신학교, 공동묘지 등을 갖추었다. 지하 각층으로 내려가는 요소마다 둥근 큰 돌로 외부 공격시 굴려 닫는 문이 안쪽에서만 여닫게 되어 있다. 개미굴 같은 이 지하도시에 4만 명까지 생활했었다 한다.

데린쿠유에서 9km나 떨어진 카이마클르 지하도시가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네브쉐히르 남쪽 20km의 카이마클르에는 1만 5천명 이상이 생활할 수 있었다. 지하 8층 중 4층까지 낮고 좁은 통로를 따라 개미집 같은 공간들을 훑다 보면 수직갱으로 된 통기 구멍도 있어 계속 공기가 유입된다. 그러나 이 통기구는 외적이 직접 공격하지 못하도록 맨 위가 꺾여 있다. 한기뿐 아니라 맨 밑은 우물이며 하수구도 마련되어 있고 5∼10cm 지름의 구멍이 각 방 사이에 뚫려 있어 적이 침입했을 때 신속히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으로 썼다. 이렇게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지하동굴 속에 감귤류를 보관해 두면 싱싱한 맛이 오래 가며 더 좋아지기까지 할 정도라 한다.

카파도키아 일대 25000평방km내에 200개 가량의 각종 크기의 지하도시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입구가 교묘히 숨겨져 있어 많이 발굴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지상 석굴 거주자들이 비밀통로로 지하도시에 연결되어 침입시에 임시로 피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지하도시는 위쪽 층보다 밑으로 들어갈수록 벽면이 부드럽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시기에 걸쳐 다른 주민들이 각각의 기술로 판 것을 알 수 있다. 주민 수가 늘어감에 따라 내부를 확장했고, 입구도 방어하기 쉽게 큰 돌 사이를 작은 돌로 잘 메웠고 입구 지붕은 길고 좁으며 매끈한 돌을 썼다.

입구 굴의 길이는 3∼10m인데 그 안쪽 끝에 직경 2m쯤 되는 큰 돌 모양의 돌문이 있어 유사시에 50cm 깊이의 홈에 밀어 넣어 밖에서 밀고 들어올 수 없게 한다. 벽과 통로에는 램프와 초를 켤 공간이 있어 빛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열도 발생시킨다. 포도주를 짜서 익히던 공간도 있고 L자 복도 끝에 화장실이 설치되기도 했다.

지하도시의 존재는 기원전 4세기의 기록부터 알려져 있으며 히타이트, 로마시대의 특징이 남아 있고 비잔틴시대(395∼1071)에는 종교적 목적으로 쓰였고 그 뒤 셀주크·오스만·터키 시대(1071∼1922) 때는 군사적 목적으로 쓰였다. 후기의 사용자들이 앞선 시대의 고고학적 증거들을 인멸시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시초는 기원전 7-8세기까지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