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문제 산책

ANTHOLOGY

선택과 호응

Author
관리자
Date
2024-04-11
Views
64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날을 선택해서 본인이 마음대로 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간혹 자기 선택으로 죽을 때를 고르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그렇게 하게끔 상황이 운명지어졌으며 인간이 선택해서 그리 되었을 것 같지 않은 초월적 힘이 있음직하다. 지나고 보면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들은 대개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그때는 굉장히 중요한 일로 여겨졌지만 죽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랴?

그러면 사소한 인간 제반사가 다 무상하고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지 몰라도, 사실 그렇게 사소한 선택이라도 잘 하고 현명하게 처신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선택 중 하나로서, 어휘끼리 사이에도 선택제약(selectional restriction)이 있다. 유명한 현대 언어학자 Chomsky가 시험적으로 만든 문장에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가 있다. 각 단어끼리 만날 때마다 서로 같이 놓일 수 없는 제약이 느껴진다. ‘색이 없는 녹색’부터, 잠을 자는데 어떻게 광란하며 잘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소위 공기제약(共起制約 cooccurrence restriction)이라고도 하여 서로 같이 출현할 수 없는 단어가 선택된 경우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호응(concordance)이나 일치(agreement)라고 하는 현상도 있어서, 주어와 술어간의 성(性), 수, 격, 인칭의 일치 및 주절과 종속절간의 시제 관계도 주목되어 왔다.

근래에 ‘너무’라는 말을 기본적 제약도 호응도 어기고 너무 마음대로 쓰는 예를 자주 듣는다. 표준어의 어감으로 하면 ‘너무 ...어서 [부정(否定)적 표현]’이란 패턴으로 써야 하는 말인데, 뒤따르는 부정적 표현을 하지 않고 쓰는 젊은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너무 좋아요.’라 해서 ‘그래서 뭐가 잘 안 되었다는 말인가?’하고 기다려도 결국 ‘정말 좋다’는 뜻으로 끝나는 것이다. 역설적 반어적으로 쓴 ‘너무 멋져요.’ 정도는 받아들인다 해도, ‘긍정 표현으로 너무 흔히 쓰는 <너무>’는 정말 너무하다고 본다. 대개 ‘아주, 매우, 무척’등으로 긍정적 표현을 해야할 경우인데 요즘 이 말들은 문어(文語)에서나 쓰고, 구어에서는 젊은이들이 모두 ‘되게’라고 바꿔서 쓴다. 결국 ‘너무’ 좋지 않으면 ‘되게’ 좋은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부사어 뒤에 부정적 서술어가 오는 예들은 꽤 많다. ‘결(단)코/그다지/꿈에도/전혀/절대(로)/좀처럼...이 아니다/...지 못하다/...지 않다/...(을 수) 없다/...서는 안되다’ 등이 있다. 뒤쪽의 부정적 서술어 대신에 ‘어렵다, 다르다, 모르다, 모자라다, 힘들다, 죽(겠)다’ 등의 부정적 표현이 나타나기도 한다. ‘비록/차라리’는 뒤따르는 ‘...(이)지만/...일지라도/...(라) 하더라도/..(라) 하여도/...일지언정/...(이)나/...(이)라도)’로 양보적 구절의 짝을 이룬 뒤에, 또 그 뒤쪽에 부정적 서술어 ‘...이 아니다/...지 못하다/...지 않다/...(을 수) 없다/...서는 안되다’를 받는다. ‘그토록/그다지 ...지만/...건만/...하니’에서 ‘그토록’은 강한 부정으로 바로 뒤 서술어에만 걸리는데, ‘그다지’는 좀 약한 부정이며 문장 전체에까지 걸리는 부사라고 한다. “가뜩이나‘는 ‘어렵다’ 등등의 부정적 표현을 바로 수식하여 ‘..ㄴ데/...는 판에’로 호응을 이룬다.

부정적 표현이 뒤에 나타나는 경우는 아니지만, ‘가령/설사 ...라 하자/...라 치자’가 있고 여기에서 ‘가령’은 확률이 좀 있는 가정문에, ‘설사’는 확률이 아주 없는 경우에 쓰인다. 그런데 ‘설사’는 ‘설사 ...인들 ...아니다/...못하다’처럼 부정적 표현과도 쓰이며, ‘설사 ...인들 ...이겠는가?’처럼 의문형 표현과도 잘 쓰인다. 선택은 언어에서도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