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문제 산책

ANTHOLOGY

선택과 호응

Author
관리자
Date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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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고 죽는 날을 선택해서 본인이 마음대로 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간혹 자기 선택으로 죽을 때를 고르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그렇게 하게끔 상황이 운명지어졌으며 인간이 선택해서 그리 되었을 것 같지 않은 초월적 힘이 있음직하다. 지나고 보면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들은 대개 사소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그때는 굉장히 중요한 일로 여겨졌지만 죽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랴?

그러면 사소한 인간 제반사가 다 무상하고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지 몰라도, 사실 그렇게 사소한 선택이라도 잘 하고 현명하게 처신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우리가 좌우할 수 있는 선택 중 하나로서, 어휘끼리 사이에도 선택제약(selectional restriction)이 있다. 유명한 현대 언어학자 Chomsky가 시험적으로 만든 문장에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가 있다. 각 단어끼리 만날 때마다 서로 같이 놓일 수 없는 제약이 느껴진다. ‘색이 없는 녹색’부터, 잠을 자는데 어떻게 광란하며 잘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소위 공기제약(共起制約 cooccurrence restriction)이라고도 하여 서로 같이 출현할 수 없는 단어가 선택된 경우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호응(concordance)이나 일치(agreement)라고 하는 현상도 있어서, 주어와 술어간의 성(性), 수, 격, 인칭의 일치 및 주절과 종속절간의 시제 관계도 주목되어 왔다.

근래에 ‘너무’라는 말을 기본적 제약도 호응도 어기고 너무 마음대로 쓰는 예를 자주 듣는다. 표준어의 어감으로 하면 ‘너무 ...어서 [부정(否定)적 표현]’이란 패턴으로 써야 하는 말인데, 뒤따르는 부정적 표현을 하지 않고 쓰는 젊은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너무 좋아요.’라 해서 ‘그래서 뭐가 잘 안 되었다는 말인가?’하고 기다려도 결국 ‘정말 좋다’는 뜻으로 끝나는 것이다. 역설적 반어적으로 쓴 ‘너무 멋져요.’ 정도는 받아들인다 해도, ‘긍정 표현으로 너무 흔히 쓰는 <너무>’는 정말 너무하다고 본다. 대개 ‘아주, 매우, 무척’등으로 긍정적 표현을 해야할 경우인데 요즘 이 말들은 문어(文語)에서나 쓰고, 구어에서는 젊은이들이 모두 ‘되게’라고 바꿔서 쓴다. 결국 ‘너무’ 좋지 않으면 ‘되게’ 좋은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부사어 뒤에 부정적 서술어가 오는 예들은 꽤 많다. ‘결(단)코/그다지/꿈에도/전혀/절대(로)/좀처럼...이 아니다/...지 못하다/...지 않다/...(을 수) 없다/...서는 안되다’ 등이 있다. 뒤쪽의 부정적 서술어 대신에 ‘어렵다, 다르다, 모르다, 모자라다, 힘들다, 죽(겠)다’ 등의 부정적 표현이 나타나기도 한다. ‘비록/차라리’는 뒤따르는 ‘...(이)지만/...일지라도/...(라) 하더라도/..(라) 하여도/...일지언정/...(이)나/...(이)라도)’로 양보적 구절의 짝을 이룬 뒤에, 또 그 뒤쪽에 부정적 서술어 ‘...이 아니다/...지 못하다/...지 않다/...(을 수) 없다/...서는 안되다’를 받는다. ‘그토록/그다지 ...지만/...건만/...하니’에서 ‘그토록’은 강한 부정으로 바로 뒤 서술어에만 걸리는데, ‘그다지’는 좀 약한 부정이며 문장 전체에까지 걸리는 부사라고 한다. “가뜩이나‘는 ‘어렵다’ 등등의 부정적 표현을 바로 수식하여 ‘..ㄴ데/...는 판에’로 호응을 이룬다.

부정적 표현이 뒤에 나타나는 경우는 아니지만, ‘가령/설사 ...라 하자/...라 치자’가 있고 여기에서 ‘가령’은 확률이 좀 있는 가정문에, ‘설사’는 확률이 아주 없는 경우에 쓰인다. 그런데 ‘설사’는 ‘설사 ...인들 ...아니다/...못하다’처럼 부정적 표현과도 쓰이며, ‘설사 ...인들 ...이겠는가?’처럼 의문형 표현과도 잘 쓰인다. 선택은 언어에서도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