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단상
ANTHOLOGY
15년만의 외도
Author
관리자
Date
2024-04-11
Views
73
15년 동안이나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비로소 해 볼 수 있게 되었다면 누구나 기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요즘 다른 무슨 낙(樂)보다도 미술의 여러 기법에 조금씩 접해 보는 일이 제일 즐겁다.
80년대 초 캔버라에 와서 한국어 강의를 호주에 처음 개설하면서 틈이 나면 그려보겠다고 유화물감 및 붓을 한 세트 사두었었다. 그러나 그 통은 한번도 열려지지 못한 채 15년만에 호주로 다시 실려 와서야 개봉이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유화라는 것에 대해 항상 경외스러운 느낌과 함께 한번 시도해 봤으면 하는 동기를 가지게 된 것은 미술선생님 덕분이다. 중학 1학년 입학 때 같이 부임해 오신, 우리 선배도 되시는, 최경한 화백은 미술시간마다 그 무거운 미술전집을 들고 오셔서 하나라도 더 보여 주시려고 열심이셨다.
미국 유학 5년간과 유럽연구 1년반쯤을 보내며 큰 도시를 여기저기 들릴 때마다 버릇처럼 먼저 찾았던 곳이 미술관과 박물관이었다. 아마 어려서 익혀 두었던 서양미술에 대한 지식이 동경심과 함께 그렇게 습관이 들도록 한 것이었다.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야 수채화는 시켜도 유화는 보통 손도 대보기 어렵다. 그래서 시드니 북부지역 아트센터에서 첫 학기를 등록할 때도 유화반을 원했었다. 그러나 그 반은 만원이었고, 내용은 다르나 또 흥미를 끄는 것이 서양세밀화(miniature)였기에 거기에 등록을 하였다.
의외로 이 반은 여러 재료와 기법에 눈을 뜰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주었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수채세밀화, 판화, 요철기법, 실루엣제작, 펜화 등을 10평방cm 남짓의 규격에 구현시키는 것이다. 노련한 여류작가가 지도를 하면서 서로 문화적 교류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루었다.
3개월후 대망의 유화 및 아크릴릭, 파스텔화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선생이 별로 가르쳐 주는 것이 없었다. 옆사람들에게 물어봐가면서 눈치반 코치반으로 이런저런 요령을 터득하였다. 이 선생은 혼자 곧잘하는 사람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겠다는 생각을 가진 듯했다.
어쨌든 이 반에서 고호의 ‘카페’그림을 임화로 그대로 그려보라해서 그렸던 것이 그럴싸하게 되어, 동료로 같이 배우던 어떤 부인이 사가겠다는 제의를 했었다. 내 생업이 바뀔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엄청난 감격적 사건이었다.
선생과 의논해보니 임화는 매번 다르게 그려지게 마련이니, 고호 원화를 다시 빌려 주면서 한 장 더 그려보고 마음에 드는 것은 본인이 보관을 하고 다른 것을 팔라고 충고하였다. 작품은 분신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잘 된 듯한 것은 아무리 좋은 값을 줘도 팔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로 등록한 과정은 새로운 미디어를 섞어 써서 추상화를 구성하는 내용이었다. 꼴라쥬, 데꼴라쥬, 젤 바탕의 채색 등 새 기법도 배웠는데 아무래도 추상화는 임화보다 어려웠다.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재주일뿐, 구체적 대상을 추상화(化)하여 재창조하는 개성있는 독창력과는 다른 것이었다. 피카소식의 작업이 더 어렵다는 것을 한 수 배운 셈이었다.
네 번째는 조각에 도전을 하였다. 도자기 만들 듯 점토성형을 해서 유약을 칠해 굽거나 또는 아크릴릭으로 칠해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더 시간과 힘이 드는 것은 역시 돌조각이었다. 가장 무른 활석을 택했는데도 정교한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한 학기가 모자랐다.
다섯째 학기에는 서양서도를 택했다. 원래 깃털로 쓰던 것을 이제는 철펜촉으로 쓰지만 서법은 옛날 그리스 로마 중세시대에 쓰던 식대로 한다. 금박지를 넣고 채색을 하기도 하며 현대적 디자인을 가미하기도 한다. 나는 이 서체로 한글서예를 개발해 볼 구상을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이번 10월부터 12월중순까지는 수채풍경화를 배워보려 한다. 시드니 주변을 찾아 직접 야외에서 진행하는 이 수업은 절경이 많은 이 곳에서 꼭 해 보아야 할 일일뿐더러, 사실 수채화가 잘 그리기에는 유화보다도 더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점점 더 어려운 고지로 올라가 보려는 욕심이다.
사실 나의 이러한 미술기호는 외가쪽에서 내려온 소질과 본가쪽에서 보고 자란 환경이 합작을 이룬 것이 아닌가 한다. 외삼촌께서는 미대를 다니셨고 계속 미술계의 업무를 관여하셨으나 작품활동은 별달리 없으셨지만, 어머님께서 늙마에 시작하신 것이기는 해도 도예와 동양화의 솜씨가 아마추어로는 일류급이시다. 나도 외탁을 한 재질이라고 믿어진다.
내가 어려서만 해도 집의 갑창마다 몇겹씩 동양화가 도배되어 켜켜 제껴져 나오는 것을 흔히 보았다. 우리집 사랑은 조선 말기 화가들의 살롱이었던 것이요, 작업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그랬겠지만 내가 뵈온 조부께서도 화가의 패트런으로 그 당시 서울 장안의 몇 안되는 지주로서 하실 역할을 하신 셈이었다. 그 덕분에 육이오 전에는 오원, 소림, 심전, 관재, 춘곡, 무호, 청전, 묵로 화백 등의 허다한 그림과 오세창씨의 글씨등이 집안에 많이 쌓여 있었다. 내가 철이 들어 작품에 대한 식견이 생겼을 때는 이미 많은 수가 흩어져 없어졌으나, 그래도 어려서 보고 자랐던 것과 동란 이후까지 남은 것에서 은근히 배워 온 취향이 오늘 이런 좋은 취미를 갖게 한 원동력이라고 감사한다.
80년대 초 캔버라에 와서 한국어 강의를 호주에 처음 개설하면서 틈이 나면 그려보겠다고 유화물감 및 붓을 한 세트 사두었었다. 그러나 그 통은 한번도 열려지지 못한 채 15년만에 호주로 다시 실려 와서야 개봉이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유화라는 것에 대해 항상 경외스러운 느낌과 함께 한번 시도해 봤으면 하는 동기를 가지게 된 것은 미술선생님 덕분이다. 중학 1학년 입학 때 같이 부임해 오신, 우리 선배도 되시는, 최경한 화백은 미술시간마다 그 무거운 미술전집을 들고 오셔서 하나라도 더 보여 주시려고 열심이셨다.
미국 유학 5년간과 유럽연구 1년반쯤을 보내며 큰 도시를 여기저기 들릴 때마다 버릇처럼 먼저 찾았던 곳이 미술관과 박물관이었다. 아마 어려서 익혀 두었던 서양미술에 대한 지식이 동경심과 함께 그렇게 습관이 들도록 한 것이었다.
한국의 중고등학교에서야 수채화는 시켜도 유화는 보통 손도 대보기 어렵다. 그래서 시드니 북부지역 아트센터에서 첫 학기를 등록할 때도 유화반을 원했었다. 그러나 그 반은 만원이었고, 내용은 다르나 또 흥미를 끄는 것이 서양세밀화(miniature)였기에 거기에 등록을 하였다.
의외로 이 반은 여러 재료와 기법에 눈을 뜰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주었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수채세밀화, 판화, 요철기법, 실루엣제작, 펜화 등을 10평방cm 남짓의 규격에 구현시키는 것이다. 노련한 여류작가가 지도를 하면서 서로 문화적 교류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루었다.
3개월후 대망의 유화 및 아크릴릭, 파스텔화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선생이 별로 가르쳐 주는 것이 없었다. 옆사람들에게 물어봐가면서 눈치반 코치반으로 이런저런 요령을 터득하였다. 이 선생은 혼자 곧잘하는 사람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겠다는 생각을 가진 듯했다.
어쨌든 이 반에서 고호의 ‘카페’그림을 임화로 그대로 그려보라해서 그렸던 것이 그럴싸하게 되어, 동료로 같이 배우던 어떤 부인이 사가겠다는 제의를 했었다. 내 생업이 바뀔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엄청난 감격적 사건이었다.
선생과 의논해보니 임화는 매번 다르게 그려지게 마련이니, 고호 원화를 다시 빌려 주면서 한 장 더 그려보고 마음에 드는 것은 본인이 보관을 하고 다른 것을 팔라고 충고하였다. 작품은 분신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잘 된 듯한 것은 아무리 좋은 값을 줘도 팔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로 등록한 과정은 새로운 미디어를 섞어 써서 추상화를 구성하는 내용이었다. 꼴라쥬, 데꼴라쥬, 젤 바탕의 채색 등 새 기법도 배웠는데 아무래도 추상화는 임화보다 어려웠다.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재주일뿐, 구체적 대상을 추상화(化)하여 재창조하는 개성있는 독창력과는 다른 것이었다. 피카소식의 작업이 더 어렵다는 것을 한 수 배운 셈이었다.
네 번째는 조각에 도전을 하였다. 도자기 만들 듯 점토성형을 해서 유약을 칠해 굽거나 또는 아크릴릭으로 칠해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더 시간과 힘이 드는 것은 역시 돌조각이었다. 가장 무른 활석을 택했는데도 정교한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한 학기가 모자랐다.
다섯째 학기에는 서양서도를 택했다. 원래 깃털로 쓰던 것을 이제는 철펜촉으로 쓰지만 서법은 옛날 그리스 로마 중세시대에 쓰던 식대로 한다. 금박지를 넣고 채색을 하기도 하며 현대적 디자인을 가미하기도 한다. 나는 이 서체로 한글서예를 개발해 볼 구상을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이번 10월부터 12월중순까지는 수채풍경화를 배워보려 한다. 시드니 주변을 찾아 직접 야외에서 진행하는 이 수업은 절경이 많은 이 곳에서 꼭 해 보아야 할 일일뿐더러, 사실 수채화가 잘 그리기에는 유화보다도 더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점점 더 어려운 고지로 올라가 보려는 욕심이다.
사실 나의 이러한 미술기호는 외가쪽에서 내려온 소질과 본가쪽에서 보고 자란 환경이 합작을 이룬 것이 아닌가 한다. 외삼촌께서는 미대를 다니셨고 계속 미술계의 업무를 관여하셨으나 작품활동은 별달리 없으셨지만, 어머님께서 늙마에 시작하신 것이기는 해도 도예와 동양화의 솜씨가 아마추어로는 일류급이시다. 나도 외탁을 한 재질이라고 믿어진다.
내가 어려서만 해도 집의 갑창마다 몇겹씩 동양화가 도배되어 켜켜 제껴져 나오는 것을 흔히 보았다. 우리집 사랑은 조선 말기 화가들의 살롱이었던 것이요, 작업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그랬겠지만 내가 뵈온 조부께서도 화가의 패트런으로 그 당시 서울 장안의 몇 안되는 지주로서 하실 역할을 하신 셈이었다. 그 덕분에 육이오 전에는 오원, 소림, 심전, 관재, 춘곡, 무호, 청전, 묵로 화백 등의 허다한 그림과 오세창씨의 글씨등이 집안에 많이 쌓여 있었다. 내가 철이 들어 작품에 대한 식견이 생겼을 때는 이미 많은 수가 흩어져 없어졌으나, 그래도 어려서 보고 자랐던 것과 동란 이후까지 남은 것에서 은근히 배워 온 취향이 오늘 이런 좋은 취미를 갖게 한 원동력이라고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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