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단상
ANTHOLOGY
위험한 사고
Author
관리자
Date
2024-04-11
Views
45
H사에 다니는 선배에게 들은 얘기다. 높건 낮건 책임자석에 있는 사람이 무슨 사유로 몇 달만 그 자리를 비워 두거나, 딴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고 떠나 있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에 대한 염려였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요즘 세태로 보아서는 필시 그 자리에 차석자가 앉으려고 애쓰거나, 대리로 맡겨 놓은 사람이 있을 경우는 그 사람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모든 일을 처리해 둘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이만해도 어쨌든 일은 되어가는 긍정적인 방향이고, 한편 반대의 가정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맡겨 놓고 갈 경우 서류의 문면(文面)에 나타나는 내용은 건네주고 갈지 모르나 그 이면에 숨은 자세한 경과나 앞으로의 계획까지는 일러주고 갈지 극히 의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만큼은 자기만 아는 비밀스런 구석을 남겨 두어야 그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는 강점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이라면 회사 전체로 보아서는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는 부정적인 방향이다.
물론 위의 얘기는 한 사람의 가정(假定)에 불과하고 일반론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회사의 인적 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필자에게는 도무지 이런 얘기가 한 사람의 입에서라도 운위될 수 있는 것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만에 한 번이라도 이같은 사태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원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동안 주인이 방심하고 있는 자리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고 들어가 앉기, 또는 자기만 알고 자기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이 현실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없지 않았다면, 위와 같은 사례는 만분지일의 가정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겠다.
학문의 발전과 사제관계가 아직도 존중되고 있는 학계에서는 ‘나만 안다. 나만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은 받아들여지기 매우 어렵고, 야비한 수단을 쓰지 않아도 자리의 교체는 자연히 진행되게 마련이다. 물론 학계에도 양식 없는 사람이 낄 수 있어서 남의 논문은 읽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업적과 역량만 과대 선전하는 데 주력하다가 실제로 따돌림받는 인사도 있다. 또 자기 제자에게 실력의 바닥이 드러나 보일까 겁을 먹고, 제자가 더 커갈 수 없게 충분한 지도육성에 인색한 옹졸파 교수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바를 토대로 일반화시키자면 학계는 여전히 건전한 편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또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대학에는 65세의 정년제도가 있어서, 젊어서 빨리 이사 자리에 한치라도 가까이 다가 서려고 조바심할 심리적 압박감이 없다는 것이다. 55세가 되기 전에 요령껏 높은 자리르 따거나 돈이라도 모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젊은 일꾼들의 행동양식에 은연중 나타난다면 그것은 제도상에도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정년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대책이 앞서야 하겠지만 아무튼 묘안(妙案)이 나와야 할 것이다.
외국처럼 일찍 은퇴하고 은급(恩級)으로 편히 살 수 있는 지경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더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최소한 일할 기회는 주어서 자기가 뛴 대가로 먹고 살게는 해 줘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하극상(下剋上)의 우려도 진급에 대한 초조감도 없이 부장이 과장에게, 과장은 계장에게, 계장은 말단 직원에게 모든 일을 친절히 일러주며 마치 대학에서 제자를 기르듯 하는 보람을 느낄 것이다. 학계가 당장 월급은 작을지 몰라도 길게 보아 이런 쓸 만한 점도 있기는 한 셈이다. (대우가족 66호, 1980.1)
물론 위의 얘기는 한 사람의 가정(假定)에 불과하고 일반론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회사의 인적 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필자에게는 도무지 이런 얘기가 한 사람의 입에서라도 운위될 수 있는 것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만에 한 번이라도 이같은 사태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원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동안 주인이 방심하고 있는 자리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고 들어가 앉기, 또는 자기만 알고 자기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이 현실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없지 않았다면, 위와 같은 사례는 만분지일의 가정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겠다.
학문의 발전과 사제관계가 아직도 존중되고 있는 학계에서는 ‘나만 안다. 나만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은 받아들여지기 매우 어렵고, 야비한 수단을 쓰지 않아도 자리의 교체는 자연히 진행되게 마련이다. 물론 학계에도 양식 없는 사람이 낄 수 있어서 남의 논문은 읽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업적과 역량만 과대 선전하는 데 주력하다가 실제로 따돌림받는 인사도 있다. 또 자기 제자에게 실력의 바닥이 드러나 보일까 겁을 먹고, 제자가 더 커갈 수 없게 충분한 지도육성에 인색한 옹졸파 교수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바를 토대로 일반화시키자면 학계는 여전히 건전한 편이다. 그러면 여기서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또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대학에는 65세의 정년제도가 있어서, 젊어서 빨리 이사 자리에 한치라도 가까이 다가 서려고 조바심할 심리적 압박감이 없다는 것이다. 55세가 되기 전에 요령껏 높은 자리르 따거나 돈이라도 모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젊은 일꾼들의 행동양식에 은연중 나타난다면 그것은 제도상에도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정년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대책이 앞서야 하겠지만 아무튼 묘안(妙案)이 나와야 할 것이다.
외국처럼 일찍 은퇴하고 은급(恩級)으로 편히 살 수 있는 지경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더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 최소한 일할 기회는 주어서 자기가 뛴 대가로 먹고 살게는 해 줘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하극상(下剋上)의 우려도 진급에 대한 초조감도 없이 부장이 과장에게, 과장은 계장에게, 계장은 말단 직원에게 모든 일을 친절히 일러주며 마치 대학에서 제자를 기르듯 하는 보람을 느낄 것이다. 학계가 당장 월급은 작을지 몰라도 길게 보아 이런 쓸 만한 점도 있기는 한 셈이다. (대우가족 66호, 19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