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단상

ANTHOLOGY

시험당하는 인생

Author
관리자
Date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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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는 여러 형태의 시험이 연속되게 마련이다. 태고적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느냐 마느냐 하는 시험을 당한 이래, 현대에는 각종 입학시험과 入社 시험 또는 고등고시 등의 형태로 우리에게 희비를 안겨 주고 인생행로를 결정 짓는다. 사실은 이런 제도화된 시험 이외에도 매일의 생활은 각종 테스트의 연속이다.

차에 받히지 않고 길을 무사히 건널 수 있는가, 남보다 먼저 택시를 잡을 능력이 있는가, 어느 상점에 가서 무슨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는가, 사업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빨리 알아서 더 큰 이익을 올리는가, 인간관계를 어떤 요령으로 원만히 유지하여 욕 안 먹고 사는가, 출세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어느 기회에 어떻게 두각을 나타내 볼 것인가 등등, 그 사람의 일거일동은 곧 시험에 대한 즉각적인 답안이라고 할 수 있다.

1월에는 각종 시험 중에서도 백미(白眉)라 할 대학입시가 있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지원자들의 긴장된 태세에 비해서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보통 이틀간 꼬박 매달려야 하는 채점 과정은 상당히 지루한 것이다. 그러나 간혹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력을 지닌 지원자의 명답안을 접하고 지루함을 면하는 일이 있어 그런대로 유쾌한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영어 시험에 ‘A woman dresses as much to please herself as to attract man.'이란 문장을 해석해 보란 문제가 있었다. 다 아시겠지만 정답은 ‘여자는 남자들을 매혹시키려는 만큼이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옷을 입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우선 상상력의 고도(高度)에 따라 온건한 것부터 소개하겠다. ‘어떤 여자는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것에 대한 재미로 옷을 입는다.’ 필요한 어휘는 대충 다 해석했지만 ‘as much~as'의 용법을 모른 경우다. ‘부인의 옷은 그녀의 기쁨만큼 남자에겐 귀찮다.’ 블론디 만화에 나오듯이 아내의 옷값에 쪼들리는 남편을 연상한 것이다. ‘부인의 드레스값은 남편을 괴롭게 한다’고 아예 의역한 것도 있다. 모두 장래에 당할 일을 미리 가불해다가 걱정해 대는 경제형(經濟型) 입시생들이다.

‘여자는 매력적인 남자에게 그녀 자신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옷을 입는다.’ 의역도 이쯤되면 상당한 수준이다. 다만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로 이해해야 할지 곤란하다.
그러나 다음 일련의 답안들을 보면 요즘 하이틴의 조숙도(早熟度)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자는 남자를 만족할 만큼 자기가 용서할 수 있는 범위에서 옷을 입는다’, ‘여자의 옷은 남자에게 접근하기에 편할 정도로 커야 한다’, ‘숙녀는 남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옷을 벗다시피 한다.(※없애야 한다)’ 아마 그런 습관을 없애야 한다는 주(註)를 붙인 것일 듯싶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여자는 옷보다 남성을 더 필요로 한다.’ 한 수 더 뜨면 ‘부인이 지니고 있는 질병만큼 그 남자에게 옮는다.’ 아마 please와 disease를 혼동한 것일 게다. 좌우간 이 학생의 발상(發想)은 곤란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여자들의 옷은 남자의 공격으로부터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역시 attract와 attack를 혼동한 불건전형(不健全型)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끝으로 아주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답안들을 보자. ‘어떤 여자는 남자와 만날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는다’, ‘여자가 남자 같은 옷을 입고 매우 즐거워한다’, ‘부엌을 남자가 돌보라고 하는만큼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 ‘여자의 옷은 여자 자신들 문제다.’

이런 답안을 쓰는 것은 물론 입시생 자신들 문제다. 결국 시험 당하는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서의 조숙한 답안들이 나오게끔 된 이면에는 사회의 책임도 많을 것이다. (대우가족 67호 19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