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단상
ANTHOLOGY
한옥에서의 생활도 '신토불이'
Author
관리자
Date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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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우리가 한옥에서 살아야 더 우리 생리에 맞는 생활을 할 수 있다든가, 더 자연스런 모습을 찾는 것이라든가 하는 말은 생각해 보면 '신토불이'나 한 가지 말이다. 다만 흙 '토' 위에 집 '옥'이 세워져 있을 뿐이 아닌가? 그야말로 '신옥불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을 배려한 주거 공간이라 한다. 따라서 집의 구조에서부터 만드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자연과의 융화를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단 등은 돌을 사용하고 기둥과 서까래, 문, 대청바닥 등은 나무를, 벽은 짚과 진흙을 섞은 흙벽으로 만들고 그 위에 천연 닥나무로 만든 한지로 도배를 했으며, 창에는 역시 한지를 발랐다. 바닥에는 장판지를 깐 뒤 콩기름 등을 발라 윤기있게 하였고 방수의 역할도 하도록 했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남산골 한옥마을 도편수 이승업 가'로 남아 있는 한옥에서 났고 청년기까지 생활하였다.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편수가 사저로 지었던 집을 증조부께서 사셔서 조부도 거기서 태어나셨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집은 격식을 갖춰 덧문, 미닫이, 갑창, 두껍닫이의 4겹 창문이 기둥 사이마다 둘러져 있던 기억이 생생히 난다. 특히 맨 안 쪽 두껍닫이는, 도배를 해마다 새로 하던 내 어릴 때만해도, 점점 종이 두께가 두꺼워져 불룩히 돋아나오는 것을 면도칼로 가운데 부분의 그림만 도려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신기하게도 떠낸 서화 밑에는 다시 먼저 도배할 때 붙였던 옛 그림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커서 깨달았지만 그 대련들은 꽤 명망 있는 서화가의 작품들로 그냥 도배 밑에 묻혀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요즘 시골서도 민화들이 이렇게 도배 밑에서 발견되곤 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한다.
전통가옥은 전통사회의 생산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집은 개인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자 바깥 세상과 관계되는 일을 보기 위한 보조공간이었고 여러 세대가 어우러져 지내는 생활공간이자 혼례, 상례, 제사, 잔치 등을 치루는 사회공간이었다. 과거 우리나라는 대가족 공동체 단위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방들은 개인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으나, 대청은 모두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마당은 마당대로 큰일을 치루는 공간으로 쓰였다.
필자는 남아였기에 사랑에 외간 손님이 계실 때도 드나들 수는 있었지만, 손님 치레가 많았던 6.25 이전 때는 워낙 어려서 어른들이 불러내 상대해 주시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사랑 마당까지는 기웃거리며 방과 마루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모습이나 부산하게 상노들이 상을 들고 오르락내리락 시중들던 모습을 건져 올린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상류주택은 내외사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안' 공간과 남자들이 사용하는 '밖'의 공간으로 구분이 되었다.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의 공간이며, 가부장적 제도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랑채는 밖 공간으로 집안의 가부장과 친지를 비롯한 남자들이 글공부를 하거나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다녀온 뒤 할아버님께서 수원에 백칸 집으로 아주 낙향하셔서 대가족제도가 허물어지고 사랑채가 텅 비자, 마침 당시 유일한 한과 전문 '호원당' 주인 조자호 여사가 우리 사랑에서 한과를 만들어 인근 신신 백화점에 내다가 보급하는 산실이 되었다. 증조부 때 이후 이 사랑채는 조선 말기 오원 장승업,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 위창 오세창, 관재 이도영, 춘곡 고희동, 무호 이한복, 청전 이상범, 묵로 이용우 등 화가들의 작업실이 되었던 것과 함께 집 자체에 무슨 생상성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신기롭다.
사실 어머니께서 득남을 하실 때는 어찌 미리 짐작을 하셨던지 조부께서 특별히 사랑방 아랫목을 비워 주셔서 형과 본인 두 아들을 보셨고, 사랑채에 오래 기거하는 손님이 있다든가 무슨 이유로 뒤안채방에서 몸을 푸셨을 때는 두 누이를 얻으신 것이다. 각 방과 남녀간의 출산이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된 셈이며, 그 터울도 3년씩 규칙적으로 되었던 점이 풍수지리적인 원인이나 없었는지 궁금하다.
그 외에도 전통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다. 상(上)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행랑아범, 어멈,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사랑)중문간 행랑채와 (안)아래채는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층인 청지기와 할멈, 안잠자기가 각각 거처하는 공간이었다.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리하여 구획하였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랑이나 아래채에는 늘상 어려운 처지나 불구인 장애인들이 집안 일을 조금씩 도우며 같이 살았다. 피난 때는 이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으나 좋은 서화 골동품들이 흩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고루 갖추었던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택에는 솟을대문이 있었다. 이 집도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이 지었으므로 규모있게 지었으며 도목수로서 주택의 장식에도 섬세하게 신경을 많이 써서 기능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집이 되었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월문은 장식성을 중시하여 색벽돌로 구성된 우아한 구조를 지녔었다.
그런데 내가 자랄 때 이 대가집의 대문은 집 규모에 안 맞게 우묵한 채로 기어 들어가듯 모양새가 잡혀 있었다. 이 집이 원래 있었던 광교 옆 삼각동은 옛날에 높은 집이 없었을 때 덕수궁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기에 궁에서 밖을 보시던 고종황제께서 저 여염집 대문이 왜 그리 높냐고 하시는 바람에 보통 높이 보다도 한참 낮춰 그리 되었다는 설화가 집안에 전해 내려온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을 배려한 주거 공간이라 한다. 따라서 집의 구조에서부터 만드는 재료에 이르기까지 자연과의 융화를 느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단 등은 돌을 사용하고 기둥과 서까래, 문, 대청바닥 등은 나무를, 벽은 짚과 진흙을 섞은 흙벽으로 만들고 그 위에 천연 닥나무로 만든 한지로 도배를 했으며, 창에는 역시 한지를 발랐다. 바닥에는 장판지를 깐 뒤 콩기름 등을 발라 윤기있게 하였고 방수의 역할도 하도록 했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남산골 한옥마을 도편수 이승업 가'로 남아 있는 한옥에서 났고 청년기까지 생활하였다.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편수가 사저로 지었던 집을 증조부께서 사셔서 조부도 거기서 태어나셨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집은 격식을 갖춰 덧문, 미닫이, 갑창, 두껍닫이의 4겹 창문이 기둥 사이마다 둘러져 있던 기억이 생생히 난다. 특히 맨 안 쪽 두껍닫이는, 도배를 해마다 새로 하던 내 어릴 때만해도, 점점 종이 두께가 두꺼워져 불룩히 돋아나오는 것을 면도칼로 가운데 부분의 그림만 도려내던 장면이 떠오른다. 신기하게도 떠낸 서화 밑에는 다시 먼저 도배할 때 붙였던 옛 그림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커서 깨달았지만 그 대련들은 꽤 명망 있는 서화가의 작품들로 그냥 도배 밑에 묻혀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요즘 시골서도 민화들이 이렇게 도배 밑에서 발견되곤 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한다.
전통가옥은 전통사회의 생산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집은 개인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자 바깥 세상과 관계되는 일을 보기 위한 보조공간이었고 여러 세대가 어우러져 지내는 생활공간이자 혼례, 상례, 제사, 잔치 등을 치루는 사회공간이었다. 과거 우리나라는 대가족 공동체 단위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방들은 개인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으나, 대청은 모두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마당은 마당대로 큰일을 치루는 공간으로 쓰였다.
필자는 남아였기에 사랑에 외간 손님이 계실 때도 드나들 수는 있었지만, 손님 치레가 많았던 6.25 이전 때는 워낙 어려서 어른들이 불러내 상대해 주시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사랑 마당까지는 기웃거리며 방과 마루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모습이나 부산하게 상노들이 상을 들고 오르락내리락 시중들던 모습을 건져 올린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상류주택은 내외사상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안' 공간과 남자들이 사용하는 '밖'의 공간으로 구분이 되었다. 안공간인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과 어린 아이들의 공간이며, 가부장적 제도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랑채는 밖 공간으로 집안의 가부장과 친지를 비롯한 남자들이 글공부를 하거나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다녀온 뒤 할아버님께서 수원에 백칸 집으로 아주 낙향하셔서 대가족제도가 허물어지고 사랑채가 텅 비자, 마침 당시 유일한 한과 전문 '호원당' 주인 조자호 여사가 우리 사랑에서 한과를 만들어 인근 신신 백화점에 내다가 보급하는 산실이 되었다. 증조부 때 이후 이 사랑채는 조선 말기 오원 장승업,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 위창 오세창, 관재 이도영, 춘곡 고희동, 무호 이한복, 청전 이상범, 묵로 이용우 등 화가들의 작업실이 되었던 것과 함께 집 자체에 무슨 생상성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신기롭다.
사실 어머니께서 득남을 하실 때는 어찌 미리 짐작을 하셨던지 조부께서 특별히 사랑방 아랫목을 비워 주셔서 형과 본인 두 아들을 보셨고, 사랑채에 오래 기거하는 손님이 있다든가 무슨 이유로 뒤안채방에서 몸을 푸셨을 때는 두 누이를 얻으신 것이다. 각 방과 남녀간의 출산이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된 셈이며, 그 터울도 3년씩 규칙적으로 되었던 점이 풍수지리적인 원인이나 없었는지 궁금하다.
그 외에도 전통주택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다. 상(上)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행랑아범, 어멈,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사랑)중문간 행랑채와 (안)아래채는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층인 청지기와 할멈, 안잠자기가 각각 거처하는 공간이었다.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리하여 구획하였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랑이나 아래채에는 늘상 어려운 처지나 불구인 장애인들이 집안 일을 조금씩 도우며 같이 살았다. 피난 때는 이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으나 좋은 서화 골동품들이 흩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고루 갖추었던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택에는 솟을대문이 있었다. 이 집도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이 지었으므로 규모있게 지었으며 도목수로서 주택의 장식에도 섬세하게 신경을 많이 써서 기능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집이 되었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월문은 장식성을 중시하여 색벽돌로 구성된 우아한 구조를 지녔었다.
그런데 내가 자랄 때 이 대가집의 대문은 집 규모에 안 맞게 우묵한 채로 기어 들어가듯 모양새가 잡혀 있었다. 이 집이 원래 있었던 광교 옆 삼각동은 옛날에 높은 집이 없었을 때 덕수궁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기에 궁에서 밖을 보시던 고종황제께서 저 여염집 대문이 왜 그리 높냐고 하시는 바람에 보통 높이 보다도 한참 낮춰 그리 되었다는 설화가 집안에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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