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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 곁에 있으니 ‘아침이슬’이 절로...
Author
관리자
Date
2014-01-09
Views
50
아크로 곁에 있으니 ‘아침이슬’이 절로...
[창간 1주년 특별기고] 아크로폴리스(LA 서울대 동창회 사이트)를 회고한다
2010년 03월 22일 (월) 07:46:21 이상억 기고자 Editor@AcropolisTimes.com
서울대 미주센터 초대 소장을 지내신 이상억 명예교수의 특별 기고입니다. <편집자주>
LA에 와서 서울대 미주센터의 윌셔 사무실을 얻자마자 <아크로폴리스 타임스>가 태어나 글을 실으라는 주문을 받은 지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아크로폴리스라는 이름이 내게는 너무 친숙했고 그 의미를 한 번 제대로 되새겨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그 때부터 품게 되었습니다. 2010년 3월 4일자 <아크로폴리스, 그 곳은 지금...>이라는 글과 사진을 보고, 바로 아크로폴리스를 옆에서 내려다보는 1동 4층 연구실에서 30년가량을 근무한 본인은 느낌이 많았습니다.
[사진1]
지난해 5월 초대 서울대 미주센터 소장으로 부임한 이상억 교수(오른쪽), 가운데는 김재수 LA총영사, 왼쪽은 이장무 서울대 총장.
원래 내가 소속된 인문대 국어국문학과는 한국학의 대표주자라 해서 학교의 모든 리스트에서 벽두를 장식하는 순위에 있고 연구실도 가장 본부에 접근된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내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꽤 민감하게 알아 챌 수 있고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그야말로 희랍시대 아크로폴리스의 기능을 누구보다 잘 겪고 보아온 셈입니다.
육군 공병부대가 지은 서울대 관악 캠퍼스는 대개 군대 바라크 스타일 건물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지만, 유독 중앙도서관 앞에 넓은 공간을 두고 본부 건물과 사이의 경사면을 계단으로 처리해 놓았습니다. 이 구조는 자연히 희랍시대 아크로폴리스 원형극장과 흡사한 기능을 가지게 되어 사람들을 꼬이게 했고, 더구나 무대 뒤의 본부는 시위학생들의 세를 과시하기 좋은 표적 대상이었습니다. 옆의 학생회관은 시위 준비기지로 가까웠고, 위쪽의 ‘중도’는 시위 숫자가 모자랄 때 항상 학생들을 보충 받는 기지가 되었습니다. 내 연구실은 이 둘레에서 객석 중 가장 특석인 한 변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시위를 막는 데 일조하려던 육군의 오착에 의한 절묘한 공간 배치였습니다. 물론 수시로 마이크를 쓰는 외침으로 수업은 지장이 많았고, 자극적 노래들은 방음되지 못한 연구실을 지키기 어렵게 했습니다. 그 무렵 미국에서 오래 공부했고 호주에서 가르치다 왔던 나는 어디서고 이런 시끄러운 캠퍼스는, 특히 주중 수업시간이 있는 때에 보지를 못했기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지나고 보면 그 시련기에 바로 이 아크로폴리스에서 일어난 일들이 바탕이 되어 한국의 민주화가 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2]
그리스 아테네의 원조 아크로폴리스 광장.
허구한 날 시위와 고성으로 지새던 80년대, 순수 구국운동이 야시시한 색깔로 변모하던 90년대, 교내의 학생 간 이념투쟁이 퇴색하고 외부 사주 집단이 틈입했던 2000년대, 이념은 가라 ‘겡제’가 제일이라는 세대가 미성방가하는 2010년대가 되었습니다. 분신부터 투신 항쟁 같은 극단의 광경은 감내하기 어려운 과거의 시련이었지만, 그 뒤 어느덧 1동 뒤 자하연에 있던 ‘오작교’(또는 헐려 버린 런던브릿지)에서 동아리 입단식 후 만취한 두 남학생이 강제 투신되어 익사하는 사고까지 나게 세태가 바뀌었었습니다. 앞 세대에 비하면 너무나 철없는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리는 철거 되고 미화 작업이 상처를 덮어 버린 것입니다. 골프장의 해저드로 만들어졌던 연못이 자하골에 살았던 ‘신위’의 유래까지 거들먹거려지며 변모되어진 것입니다. 사연을 모른 채 그냥 현재의 나무 데크 시설로 잘 꾸며진 호숫가 유원지풍을 단순히 즐기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밤에 조명이 들어온 신비로운 광경을 보면 모네의 ‘수련연못’이 아닌 별천지를 또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 매년 새로 입학한 풋내기 학생들은 이 주변을 가장 데이트하기 좋은 곳으로만 알 것입니다.
아크로폴리스 중앙부에서 일어난 일 중, 이현재 총장시 총장님이 직접 학생들 스피커 전기 코드를 본관 벽에서 뽑았다가 격돌한 일, 조완규 총장시 본부 난입 학생들에 의해 학생처장실 집기가 4층에서 아크로 바닥에 모두 내던져진 일--이 때 나도 4층에서 교무부처장 일을 보던 때라 그 참담한 심정은 정말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이후 본부 건물 2층 계단 위부터 유사시 닫히는 ‘방인벽’이 강화되었습니다. 사실 87년 8월 교무부처장 취임 첫날 사무실 한 구석에 있는 야전 침대가 학생들 농성 시위시 철야할 경우 쓴다는 설명부터 들어야 했었습니다만, 그 뒤 정가에 약간 민주화 바람이 불어 다행히 잔 일은 없었습니다.
아크로 주변, 즉 도서관과의 사이 비탈에 널려진 정원도 수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애초 서울대로 부임했던 80년대 초에는 장미나무들이 수백 그루 아름답게 꽃피어 있었으나 어느 해 무지막지한 학생들이 다 뽑아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대규모로 시위하는 데 방해가 되도록 가시가 있는 나무를 일부러 심어 놓았다는 오해와 억설로 인해서였습니다. 그 때 난리를 피한 세 그루 정도만 지금도 불균형하게 한 쪽에 남아 있습니다. 이 남은 장미들을 볼 때마다 이런 식의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아크로에서는 여러 가지 노래가 불리고 고함과 선동이 난무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서울대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서울대 신입생이 된 고등학교 문예반 선배들과 초여름 캠핑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서울대 교가를 가르쳐 주면서 가사는 개사해서 “가슴마다 성스러운 성욕을 품고...”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 시위만 일삼는 것 보다 낭만적인 장난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표 및 교문의 ㄱ ㅅ ㄷ은 “국립서울대학교” 대신 “계집(망언다사), 술, 돈”이라고 풀며 장난치던 치기도 있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의 서쪽에 지금은 ‘C 63 학생화관’이라고 써있는 벽에 80년대에는 ‘미제를 응징하는 그림’이 천연색으로 요란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학교 당국에서는 페인트로 덮어 버릴까도 했는데 결국 오래 방치할 수밖에 없어서 외국에서 오는 학교 손님들도 찢어진 성조기 그림을 사진 찍어 가는 명소가 되었었습니다. 그 남쪽 학생회관 앞 계단 중간에도 투쟁적인 망치를 든 철판 인물상이 있어 데모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수시로 학생회관을 덮던 대자보는 1동에서 정면으로 잘 보이는 방향이라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내 서울대 생활 30년가량의 전반기는 특히 한국 민주화 과정의 주도적 현장이라 할 아크로폴리스를 내려다보다가, 강의실에 들어가 무엇이 교육자가 할 일인가 고뇌도 하면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후반기는 그래도 그런 의식 활동보다 진리 탐구에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지금도 ‘아침이슬’을 잘 외어 부르는 이유는 이 연구실에서 귀에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사진3]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의 현 모습.
[창간 1주년 특별기고] 아크로폴리스(LA 서울대 동창회 사이트)를 회고한다
2010년 03월 22일 (월) 07:46:21 이상억 기고자 Editor@AcropolisTimes.com
서울대 미주센터 초대 소장을 지내신 이상억 명예교수의 특별 기고입니다. <편집자주>
LA에 와서 서울대 미주센터의 윌셔 사무실을 얻자마자 <아크로폴리스 타임스>가 태어나 글을 실으라는 주문을 받은 지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아크로폴리스라는 이름이 내게는 너무 친숙했고 그 의미를 한 번 제대로 되새겨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그 때부터 품게 되었습니다. 2010년 3월 4일자 <아크로폴리스, 그 곳은 지금...>이라는 글과 사진을 보고, 바로 아크로폴리스를 옆에서 내려다보는 1동 4층 연구실에서 30년가량을 근무한 본인은 느낌이 많았습니다.
[사진1]
지난해 5월 초대 서울대 미주센터 소장으로 부임한 이상억 교수(오른쪽), 가운데는 김재수 LA총영사, 왼쪽은 이장무 서울대 총장.
원래 내가 소속된 인문대 국어국문학과는 한국학의 대표주자라 해서 학교의 모든 리스트에서 벽두를 장식하는 순위에 있고 연구실도 가장 본부에 접근된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내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꽤 민감하게 알아 챌 수 있고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그야말로 희랍시대 아크로폴리스의 기능을 누구보다 잘 겪고 보아온 셈입니다.
육군 공병부대가 지은 서울대 관악 캠퍼스는 대개 군대 바라크 스타일 건물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지만, 유독 중앙도서관 앞에 넓은 공간을 두고 본부 건물과 사이의 경사면을 계단으로 처리해 놓았습니다. 이 구조는 자연히 희랍시대 아크로폴리스 원형극장과 흡사한 기능을 가지게 되어 사람들을 꼬이게 했고, 더구나 무대 뒤의 본부는 시위학생들의 세를 과시하기 좋은 표적 대상이었습니다. 옆의 학생회관은 시위 준비기지로 가까웠고, 위쪽의 ‘중도’는 시위 숫자가 모자랄 때 항상 학생들을 보충 받는 기지가 되었습니다. 내 연구실은 이 둘레에서 객석 중 가장 특석인 한 변을 차지했던 것입니다.
시위를 막는 데 일조하려던 육군의 오착에 의한 절묘한 공간 배치였습니다. 물론 수시로 마이크를 쓰는 외침으로 수업은 지장이 많았고, 자극적 노래들은 방음되지 못한 연구실을 지키기 어렵게 했습니다. 그 무렵 미국에서 오래 공부했고 호주에서 가르치다 왔던 나는 어디서고 이런 시끄러운 캠퍼스는, 특히 주중 수업시간이 있는 때에 보지를 못했기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지나고 보면 그 시련기에 바로 이 아크로폴리스에서 일어난 일들이 바탕이 되어 한국의 민주화가 궤도에 올랐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2]
그리스 아테네의 원조 아크로폴리스 광장.
허구한 날 시위와 고성으로 지새던 80년대, 순수 구국운동이 야시시한 색깔로 변모하던 90년대, 교내의 학생 간 이념투쟁이 퇴색하고 외부 사주 집단이 틈입했던 2000년대, 이념은 가라 ‘겡제’가 제일이라는 세대가 미성방가하는 2010년대가 되었습니다. 분신부터 투신 항쟁 같은 극단의 광경은 감내하기 어려운 과거의 시련이었지만, 그 뒤 어느덧 1동 뒤 자하연에 있던 ‘오작교’(또는 헐려 버린 런던브릿지)에서 동아리 입단식 후 만취한 두 남학생이 강제 투신되어 익사하는 사고까지 나게 세태가 바뀌었었습니다. 앞 세대에 비하면 너무나 철없는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리는 철거 되고 미화 작업이 상처를 덮어 버린 것입니다. 골프장의 해저드로 만들어졌던 연못이 자하골에 살았던 ‘신위’의 유래까지 거들먹거려지며 변모되어진 것입니다. 사연을 모른 채 그냥 현재의 나무 데크 시설로 잘 꾸며진 호숫가 유원지풍을 단순히 즐기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밤에 조명이 들어온 신비로운 광경을 보면 모네의 ‘수련연못’이 아닌 별천지를 또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 매년 새로 입학한 풋내기 학생들은 이 주변을 가장 데이트하기 좋은 곳으로만 알 것입니다.
아크로폴리스 중앙부에서 일어난 일 중, 이현재 총장시 총장님이 직접 학생들 스피커 전기 코드를 본관 벽에서 뽑았다가 격돌한 일, 조완규 총장시 본부 난입 학생들에 의해 학생처장실 집기가 4층에서 아크로 바닥에 모두 내던져진 일--이 때 나도 4층에서 교무부처장 일을 보던 때라 그 참담한 심정은 정말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이후 본부 건물 2층 계단 위부터 유사시 닫히는 ‘방인벽’이 강화되었습니다. 사실 87년 8월 교무부처장 취임 첫날 사무실 한 구석에 있는 야전 침대가 학생들 농성 시위시 철야할 경우 쓴다는 설명부터 들어야 했었습니다만, 그 뒤 정가에 약간 민주화 바람이 불어 다행히 잔 일은 없었습니다.
아크로 주변, 즉 도서관과의 사이 비탈에 널려진 정원도 수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애초 서울대로 부임했던 80년대 초에는 장미나무들이 수백 그루 아름답게 꽃피어 있었으나 어느 해 무지막지한 학생들이 다 뽑아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대규모로 시위하는 데 방해가 되도록 가시가 있는 나무를 일부러 심어 놓았다는 오해와 억설로 인해서였습니다. 그 때 난리를 피한 세 그루 정도만 지금도 불균형하게 한 쪽에 남아 있습니다. 이 남은 장미들을 볼 때마다 이런 식의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아크로에서는 여러 가지 노래가 불리고 고함과 선동이 난무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서울대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서울대 신입생이 된 고등학교 문예반 선배들과 초여름 캠핑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서울대 교가를 가르쳐 주면서 가사는 개사해서 “가슴마다 성스러운 성욕을 품고...”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 시위만 일삼는 것 보다 낭만적인 장난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표 및 교문의 ㄱ ㅅ ㄷ은 “국립서울대학교” 대신 “계집(망언다사), 술, 돈”이라고 풀며 장난치던 치기도 있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의 서쪽에 지금은 ‘C 63 학생화관’이라고 써있는 벽에 80년대에는 ‘미제를 응징하는 그림’이 천연색으로 요란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학교 당국에서는 페인트로 덮어 버릴까도 했는데 결국 오래 방치할 수밖에 없어서 외국에서 오는 학교 손님들도 찢어진 성조기 그림을 사진 찍어 가는 명소가 되었었습니다. 그 남쪽 학생회관 앞 계단 중간에도 투쟁적인 망치를 든 철판 인물상이 있어 데모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수시로 학생회관을 덮던 대자보는 1동에서 정면으로 잘 보이는 방향이라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내 서울대 생활 30년가량의 전반기는 특히 한국 민주화 과정의 주도적 현장이라 할 아크로폴리스를 내려다보다가, 강의실에 들어가 무엇이 교육자가 할 일인가 고뇌도 하면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후반기는 그래도 그런 의식 활동보다 진리 탐구에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지금도 ‘아침이슬’을 잘 외어 부르는 이유는 이 연구실에서 귀에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사진3]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의 현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