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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신전의 사과 한 알 —이/요/이 기행문—

Author
관리자
Date
20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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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1. 여정

한국의 대한 추위를 피해 11일간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이/요/이) 삼국을 여행했다. KAL이 직항하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그 남쪽 해안에 있는 옛 항구 욥바를 거쳐, 45킬로 북쪽 해안의 카이사리아에서 헤롯왕의 유적을 보고, 남동쪽 103킬로 거리의 예루살렘에서 2박을 했다. 그리스나 로마 유적을 보면 항상 허물어지고 깨진 돌무더기를 관광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예루살렘은 그 곳 자체가 생활의 터전으로 누천년을 내려 왔기에 돌무더기가 방치되는 것보다 그때그때 점령자들의 건축이란 옷을 입고 가려져 있는 상황이었다.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를 영화처럼 그리며 찾아갔던 사람에게는 너무 상상 밖의 구조물들, 그것도 우상 숭배에 가까운 치장들이 눈을 어지럽게 한다. 예루살렘 일대를 순례하고 다시 남쪽으로 사해를 따라 가다 그 초입 쿰란에서 발굴된 사해 성경 사본을 본 뒤 사해 진흙 마시지와 부영 체험 및 미네랄 온천욕을 하였다. 사해 남부 서안에 있는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에 대한 유대인의 항전 옥쇄 현장도 보았다.
예루살렘 고지대에서 내려오면 남쪽은 광야 지대라는 거의 불모의 암산이어서 과연 이런 환경이 종교적 고민을 하게 하여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탄생했었다고 실감하였다. 다만 물이 줄어들어 생긴 사해 근처 땅에만 현대적 대추야자 농원들이 조성되어 있었다. 요르단 국경으로 들어가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한 느보산을 방문 후 암만에서 1박하였다. [이 원래 일정은 날씨 조건에 따라 둘째 셋째 날 코스가 교환 조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성지 순례에 보통 포함되는 곳들이었고, 여정 4일째 오래 기대하던 페트라 협곡을 탐방하게 되었다. 요르단 남부가 과거 교역의 주요 통로가 되었을 때 나바티아인들이 이룬 황홀한 석각 문명이었다. 지형의 특이함이나 세련된 조각 솜씨들이 일품이었다. 현재 연간 30만의 관광객이 300억 원의 수익을 주어 요르단의 제일 관광지가 되고 있는 곳이다. 이 일대의 와디럼 사막 골짜기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의 배경이 된 곳으로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라비안 말들의 120킬로 경주가 벌어지는 천연 무대다.
성지 순례를 더 고되게 하는 팀들은 시나이 반도까지 넘나드는데, 우리도 페트라에서 아카바로 내려와 이스라엘의 에일랏을 통과해 이집트의 아카바만 휴양도시 누웨바에서 1박하고 시나이 반도 남단 샤름 엘 세이크를 경유, 다시 북쪽 스에즈 운하를 건너 z자의 형상으로 내려가 홍해 서안 휴양지 후루가다까지 약1000킬로를 주파하였다. 이 구간은 관광버스로 무려 15시간 정도 소요되었는데 한 시간은 기름 넣는 줄에서 허송하였다. 이집트는 유류 배급부터 불안할 뿐 아니라 게릴라 출몰 지역에서는 호송 차량이 저속으로 컨보이를 하느라고 시간이 무척 지연되었다.
후루가다 1박 후 다시 약 500킬로를 아스완까지 하루 동안 달려 1박하였다. 아스완에서 새벽 4시에 떠나 아부심벨까지 가는 3시간 사이에 해가 떴다. 아브심벨 신전들은 1968년 유네스코 와 50개국의 도움으로 아스완 댐 속 물에 잠길 돌 신전을 끌어 올려 재건립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거대한 아스완 댐을 경유 오벨리스크 채석장도 본 뒤 펠루카라는 나일강의 돛단배를 타 보았다. 이집트는 나일강가를 빼고는 다 사막이어서 강을 따라 크루즈로 하류 즉 북쪽으로 가는 편이 좋았다.
크루즈 배에서 3박을 하면서 강가의 콤옴보와 에드푸에 기착하여 신전들을 들렀고, 룩소르(옛 테베)에서는 새벽에 열기구를 타고 공중에서 둘러본 뒤 조종 미숙으로 ‘거칠게’ 내려왔고, 하루 종일 묘지 및 신전들과 장제장을 훑었다. 이날 밤 룩소르 신전에 들렀을 때 주머니에 있던 작은 사과 한 알을 따라다니던 아이에게 주었더니 이 녀석이 다른 아이까지 소개해 한 시간 이상 더 달라고 조르며 달라붙었다. 하나 밖에 없었으니 이해하라 해도 막무가내였다.
마지막 날은 룩소르에서 비행기로 카이로로 이동해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을 대충 관람 후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보러 13킬로 서쪽 기자 지구로 갔다. 서기전 5000년 선왕조시대 또는 서기전 3100년 초기 왕조시대부터 쳐서 31왕조가 계속 되다가, 서기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후 서기전 30년 그리스 혈통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에 망할 때까지, 그리고 무슬림에 의해 지배된 620년 이후,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침략 이후 약 백년간 영국지배를 받기까지 명멸한 수많은 지배자들이 쌓은 유물들이 박물관과 나일 강변에 흩어져 있다.

2. 정치 및 경제 정세

이집트는 2013년 1월 25일 예고되었던 대로 새로운 대규모 데모가 일어났다. 내가 이/요/이여행을 마치고 떠나온 지 사흘만이다. 왜 이런 사태가 반복될까? 2011년 1월부터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이 이집트의 파피루스 혁명으로 북아프리카 지역을 휩쓴 뒤 이슬람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이 주목되고 있다. 튀니지(벤 알리, 24년), 리비아(가다피, 42년), 이집트(무바라크, 30년), 예멘(살레, 21년) 등과 같은 중동-북아프리카의 장기독재자들이 무너졌고 시리아(아사드, 11년) 등 권위주의 국가들로 퍼져갔다. 중동-북아프리카는 이슬람문명의 중심지면서 세계 에너지원의 중요 생산지로 여기에는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터키, 수단, 튀니지, 모로코, 모리타니아가 더 포함되어 있다. 최근 알제리 가스공장 공격, 말리 북부의 알카에다 침투도 다 이런 영향권 이야기다.
“수에즈 운하가 있는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1928년부터 성장해온 글로벌 이슬람원리주의의 운동의 온상이다.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간 무슬림형제단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무장투쟁과 이슬람 NGO로 활동하다가 1987년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민중봉기)를 거쳐 하마스당으로 변신하였고, 현재 가자지역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금융과 교육 영역에 침투하여 글로벌 이슬람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알카에다를 창설한 ‘사우디 부자집 아들’ 빈라덴도 중등학교 때 무슬림형제단 출신 체육교사를 만나면서 이슬람 전사로 성장했고, 결국 아프가니스탄 반소련 지하드에 뛰어들게 된다.” [서동찬: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중동-북아프리카 시민혁명과 천국운동”]
이 지역에서 친서구적인 권위주의 정권 붕괴 이후 이슬람원리주의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증가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내적으로 군부가 실권을 다 내놓지 않고 있지만, 과거 무바라크처럼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하고 경제를 민영화하고 서구 자본을 유치하는 등 현실주의 노선만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고 있다. 한편 이집트 국민들은 시민혁명이 이슬람혁명으로 변색할 경우 이란처럼 국제사회의 봉쇄를 자초하고 말 것을 알기에 무슬림형제단의 정치 장악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시민들은 지향점도 구심점도 없이 거듭되는 데모로 관광조차 어렵게 되어 경제만 피폐해지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사실 시민혁명의 심층적인 원인은 2008년 후반기 때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경기 후퇴의 여파로 증폭된 청년실업문제와 또 하나는 사회네트워크(SNS)의 위력이다. “중동-아프리카 지역은 30세 미만 인구가 70퍼센트 이상의 젊은 국가들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급격한 인구성장이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하지 못해 교육과 고용에 있어서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안고 있다. 이번에 물러난 무바라크와 벤 알리 정권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최소화 하고 기간산업을 민영화 시키는 정책 전환을 추진해왔다. 민영화의 과정에서 독재정권의 친인척과 측근 인사들이 국영기업의 노른자위를 독차지 했고, 사회복지정책의 축소에 따른 사회빈곤층의 문제를 정권이 경시한 것이 결국 시민 폭동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사회네트워크의 대중화는 반정부운동에 국가 통제를 벗어난 정보로 가공할 만한 운동 파괴력을 가져다 주었다. 누군가 그 장면을 보고 있고 이동전화로 찍어서 웹에 올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시민들은 대범해질 수 있었다.”[서동찬: 동상]
튀니지와 이집트는 거대한 시위대의 활동을 처음으로 경험한 데다 중동 국가들처럼 산유국의 지위로 막대한 세입을 누리는 국가도 아니었고, 산유국에 나간 노동자들의 송금도 미국 등의 경기침체에 따른 유가하락 탓에 줄었으므로, 대중을 진정시키는 조처를 취하는 데 서툴렀다.

3. 종교적 성찰

룩소르 신전에서 사과 한 알을 졸라대던 아이에게 이런 정치 경제적 배경 설명은 사치스런 얘기다. 사막과 광야의 암산에서 종교적 고민을 하여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탄생했었다는 데서 무슨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유대교는 독선적 선민의식으로 중동에 평화를 가져다주기는 어려운 원초적 문제가 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높은 장벽을 쌓고 검문소를 철저히 유지해야 생존할 수 있는 거의 영구적 미해결의 처지다. 심지어 여권의 출입국 도장도 별지에 받아야 주변의 이슬람 국가에 탈없이 입국이 된다.
이스람교도 이런 타종교를 받아들일 아량이 없는 전투적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교리대로 평화와 자비와 용서를 지키려 하겠지만, 극단주의자들이 더욱 눈에 띄게 활동을 하는 것이 문제다. ‘이슬람’은 원래 신의 뜻과 가르침을 받아들여 순종한다는 뜻이라는데, 일부가 인간의 뜻을 신의 뜻으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꺼삣하면 쓰는 ‘인살라’라는 말도 인간이 책임져야 할 일에도 ‘신의 뜻이다’라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면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기독교 쪽도 썩 잘한 형편은 못 된다. 위에 열거한 독재자들은 서방 기독교 국가들의 자본주의 세력과 결탁하여 이권을 나눠 먹으며 부패하게 되고, 민중의 복리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앞잡이가 되어 왔다. 심지어 시리아의 아사드 부자가 오래도록 나라를 망가트려도 대안을 찾지 못하는 것이 서방의 태도인 것이다. 독재자 대신 무슬림형제들이 집권하는 상황은 더 꺼려지기 때문이다. 원래 카톨릭도 남미의 2500만 인구를 180명의 스페인 군인이 짖밟고 들어 갈 때 식민 사업의 뒷전을 받치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런 일들은 아무리 좋은 교리라도 인간들이 자신을 위해 왜곡시키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신들이 통곡하거나 진노하기도 지칠 만큼 너무 도처에서 빈발한 것이다.
그러면 평화와 자비와 용서를 역시 표방하는 불교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원래 불교는 한국의 현세적 샤머니즘에서 해결해 주지 못하는 내세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는 교리로 삼국시대에 영입되어 고려 때까지 크게 융성했으나 결국 자체적 부패로 다시 현세철학인 유교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원래 불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현실에 대한 체념과 도피를 유도하여 불만을 해소시키고 악정과 환난을 인내하게 한다. 이런 체념에 기반한 초월의식은 결코 현실적 문제를 개선하지는 못한다. 그냥 종교적 일시 마취제(이는 공산주의자가 쓴 마약이란 뜻과 아주 다른 개념이다)라고나 할까? 인도에도 꽃제비 같은 애들이 따라 붙지만 얘들은 이집트 애들보다 좀 종교적 마취가 된 듯 그리 악착같지는 못하다. 극렬하게 끝까지 따라다니지 못하고 체념하는 모습이 오히려 측은하기도 하단 말이다. 구름 잡는 듯한 다신교 힌두교보다 무슬림은 더 철저한 융통성 없는 유일신교라서 그 분위기를 애들까지 드러내나 보다.
조그만 사과 한 알을 졸라 대던 애 때문에 이리 애매하게 종교 문제까지 거들먹거렸다. 앞서 말했듯이 예루살렘 성지마다 잡답스러운 우상적 건축물이 뒤덮고 있었다. 아랍식 모스크 바위돔에는 가난한 요르단국의 금을 24킬로나 덮어 놓았다. 어찌 보면 같은 식으로 종교의 교리에도 일면 인간들이 많이 꾸며 덮은 도그마가 섞여 있어, 이와 같이 ‘사과’의 문제를 아담과 이브 이래 아직까지도 좀처럼 명쾌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도 유대교나 이슬람교 다음 가라면 서러울 독선적 종교니 아마 이들 종교 간에는 조화나 상생보다는 배타적선택의 문제만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사과’는 죄악과 가난의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인간의 손에서 손으로 굴러다니다가,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지는 못하고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 명확한 사실을 가지고 뉴턴이 새삼 중력의 법칙이라고 전매특허를 얻어 인류 역사에 과학자로서의 이름을 과분히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2013.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