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와 한국문화

ANTHOLOGY

한글날을 되새기며 - 한글의 우수함은 곧 문자의 우수함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4-11
조회
47
에스키모 언어 속에는 눈(雪)에 대한 어휘가 다채롭게 발달되어 있다. 갓 내려서 사박사박한 눈, 얼음집을 만들기 좋게 약간 굳은 눈 등등으로 10여개 단어가 구별되어 있다. 우리 말로는 길게 표현해야 할 개념들이 한 단어에 담겨 있다. 한편 우리말에는 눈, 진눈깨비 정도의 말이 떠오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진눈깨비도 '눈'에 '진'과 '깨비'가 앞뒤에 붙어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진눈, 마른눈'이 대조가 되어 발생된 것이다. 가루눈, 함박눈, 밤눈, 도둑눈, 첫눈, 풋눈, 소나기눈, 싸라기눈 등 아무리 찾아 봐도 모두 복합된 말뿐이요 한 개의 단순어는 아니다.

각개 언어는 그 말을 쓰는 사회의 특성에 따라 발달한다. 에스키모어는 그들의 생활에 가장 필요한 어휘는 다양하게 가지고 있으나, 물론 현대적 첨단 과학용어는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 한국어가 에스키모어보다 적어도 컴퓨터에 관한 어휘는 더 많이 쓰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언어들은 자기 사회에 자족(自足)하는 체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결코 다른 언어와 우열을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스키모들이 한국과 같이 전자공업의 발달을 보지 못했으므로 불완전한 언어를 쓰고 있으리라는 추측을 한다면 큰 오산이다. 언어학에서는 각 언어들을 우수하다, 아니다로 비교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에스키모인들이 현대 문명의 수준에서는 뒤떨어져 있을지 몰라도, 언어 문화 자체가 미개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요즘도 '한글이 우수하다'라는 말을 하면서 이 속에 마치 한국어가 다른 언어보다 특별히 우수하다는 뜻을 포함해서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글이 우수하다'는 말을 한글이란 문자체계가 우수하다는 뜻으로 쓰는 것은 조금도 잘못이 없다. 한글은 음성기관을 상징한 문자로서 세상에 유래가 없는 독특한 조직을 지닌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가 우수하다고 해서 그 언어 자체가 우수한 것은 아니다. 언어와 문자는 별개인 법이다. 이 세계에 문자가 없는 언어는 오늘날에도 허다하다. 한글날을 기념하며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되새기는 일은 사실 정확히 말해 문자에 대한 자랑에만 그쳐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많은 교사들까지 한국어가 우수한 언어라는 식으로 근거 없는 국수주의적 교육을 자행하고 있다.

'한글'이란 용어를 문자만 가리키는데 쓰지 않고 한국어란 언어를 가리키는 데도 쓰는 일부 학자들의 그릇된 습관이 이런 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교사나 일반인들은 별로 반성 없이 이 잘못을 따르고 있고, 후진국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국수주의가 이런 분위기를 북돋워 주고 있는 꼴이다. 우리 한국어가 다른 언어보다 우수하다 아니다 하는 관점이 아니라, 한글의 우수함은 곧 문자의 우수함일 뿐이다. 언어로서는 현재 세상의 어떠한 언어도 더 우수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글날에 되새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