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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LOGY
전상범 선생님과의 인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5-12
조회
74
2021, 전상범 선생님과의 인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회보 17: 311-312
전상범(1934~2021) 선생님과는 여러 차례 인연이 엮여 돌이켜 보고 싶은 많은 추억이 수 북이 떠오른다. 폐 끼치기 싫어하시는 본인께서는 추도문도 쓰지 말라 하셨다니, 겪었던 일 이 생각나는 대로 그냥 수상문(隨想文)을 적어 보겠다. 이미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 org› wiki › 전상범’만 보아도 학력, 업적 등의 정보는 다 나와 있기에 여기서는 그 외의 내용 을 주로 담기로 한다.
처음 뵈었던 때는 꼭 60년 전 경기고등학교(1959~1963 재직) 불어반 불어 선생님으로 등 장하신 깔끔한 인상의 선생님이셨다. 5·16 직후 군에 급히 입대하시게 된 원래의 불어 선생님 빈자리를 영어 교사가 당당히 자원해서 담당하신 것이다. 평남 중화 태생이신 선생님은 평양 에서 러시아어도 공부하다 오셨다는 소문이 들렸고, 칠판 글씨가 너무도 가지런한 명필이라 우리는 역시 반듯하게 잘 따르며 배웠다. 또 교사들도 출동하는 운동회에서는 늘 큰 키의 청 년 배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셨다. 당시 경기고는 교수 후보 대기소라 할 만해서 국어, 영어 과목만 해도 이기문, 안병희, 이병건, 이어령, 신동욱 등의 쟁쟁한 서울대 졸업생들이 교무실 을 채우고 계셨었다.
학부를 다닐 동안은 서울대 문리대와 사범대 교정이 달라 별로 뵙지를 못했지만, 대학원생 이 되면서 당시 서울대 어학연구소 조교로 근무할 동안 언어학 관계 학회의 많은 모임에서 간간이 뵌 일이 있다. 그러다 1973년 인디아나 대학에서 좀 늦은 박사과정을 끝내 가실 때, 나는 플부라이트 장학생 초기 오리엔테이션을 그 캠퍼스에서 받으러 가서 여름 두 달을 함께 보냈다. 이때 이병건, 양동휘, 이정민 선생님들도 거기 몰려 계셨었다.
하버드·일리노이 대학을 거쳐 1979년 언어학 박사가 되어 귀국을 하니 서울대가 관악으로 통합되어 이전해 있었고, 나는 고려대학교에서 첫 번 교수직을 잘 시작했다가 1982년 서울대 로 옮겨 그 뒤 전 선생님을 교내에서도 쉽게 뵈었다. 1983년 2월에는 한국언어학회 산하에 세분된 전공분야 학회를 두어야겠다는 부탁에 따라 현 한국음운론학회(The Phonology- Morphology Circle of Korea)의 전신 음운론연구회(The Phonology Workshop) 창립을 주 도했다. 통사론 분야 다음번의 전문학회로 조직하면서, 처음에는 작년에 작고하신 은사 이기 문 교수님 등 국어학자들도 다수 참여하여 토대를 넓혀 주셨고, 전 선생님도 오래 기둥이 되 어 주셨다.
1985년 훔볼트 팰로우로 독일에 갔다가 돌아와 본부 교무부처장을 맡게 되면서 음운론학 회를 계속 못 나가다가 1990년대부터 다시 나가니, 전 선생님께서 한영희 교수님과 함께 기 둥 역할을 해 주고 계셨었다. 비록 중간에 사정상 긴 결석은 했지만 학회 창립자로 무한한 애 정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원로 분들이 그지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매번 강독에서 가장 적절 한 코멘트를 해 주셨고, 그런 공부하는 학자의 자세를 우리는 보고 배우며 자란 것이다. 전 선생님은 일 처리를 반듯하게 하시는 평판에 수능 학력고사 출제위원장도 몇 해씩 맡으셨다. 그때 젊은 교수들이 함께 애쓰며 합숙한 기억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특히 교무부처장으로서 연중 한 달간 합숙하며 출제 채점을 총괄하는 책임자였기에 이렇게 긴장과 엄정을 기하는 일 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는데, 아무 탈 없이 매끈하게 위원장 일을 여러 번 즐거이 해내신 것을 감탄할 뿐이다.
전 선생님은 모르는 사이 꽤 두꺼운 책들을 집필하거나 번역해 내셔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는 분이셨다. 이런 일도 아무나 흉내 내지 못할 수준과 분량의 업 적이었다. 또 나는 국어학자로서 전 선생님 박사 논문 중의 국어 자료 부분을 참고하면서 내 박사 논문을 1979년에 마쳤던 기억이 있고, 그 뒤에도 국어에 대한 고견을 많이 내주신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요즘은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배운 이론을 국어에 적용 해 보는 노력을 덜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선배님들의 족적을 살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전 선생님께서 이제는 편히 쉬시면서 해 놓으신 많은 연구 업적을 책장에 놓고 바라보시며 미소 지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인 박희진 교수님도 제 처의 이화여고 영어 선생님을 하셨었다니 겹으로 제자가 된 처지라 이렇게 글이라도 올려 위로를 드리고 싶다.
[음운론학회(www.phonology.or.kr/xe/download/5826)를 접속하여 첨부 파일을 열면 한 국음운론학회 초기 통지문 #8에 전상범 교수 등의 강독 활동을 볼 수 있다.]
전상범(1934~2021) 선생님과는 여러 차례 인연이 엮여 돌이켜 보고 싶은 많은 추억이 수 북이 떠오른다. 폐 끼치기 싫어하시는 본인께서는 추도문도 쓰지 말라 하셨다니, 겪었던 일 이 생각나는 대로 그냥 수상문(隨想文)을 적어 보겠다. 이미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 org› wiki › 전상범’만 보아도 학력, 업적 등의 정보는 다 나와 있기에 여기서는 그 외의 내용 을 주로 담기로 한다.
처음 뵈었던 때는 꼭 60년 전 경기고등학교(1959~1963 재직) 불어반 불어 선생님으로 등 장하신 깔끔한 인상의 선생님이셨다. 5·16 직후 군에 급히 입대하시게 된 원래의 불어 선생님 빈자리를 영어 교사가 당당히 자원해서 담당하신 것이다. 평남 중화 태생이신 선생님은 평양 에서 러시아어도 공부하다 오셨다는 소문이 들렸고, 칠판 글씨가 너무도 가지런한 명필이라 우리는 역시 반듯하게 잘 따르며 배웠다. 또 교사들도 출동하는 운동회에서는 늘 큰 키의 청 년 배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셨다. 당시 경기고는 교수 후보 대기소라 할 만해서 국어, 영어 과목만 해도 이기문, 안병희, 이병건, 이어령, 신동욱 등의 쟁쟁한 서울대 졸업생들이 교무실 을 채우고 계셨었다.
학부를 다닐 동안은 서울대 문리대와 사범대 교정이 달라 별로 뵙지를 못했지만, 대학원생 이 되면서 당시 서울대 어학연구소 조교로 근무할 동안 언어학 관계 학회의 많은 모임에서 간간이 뵌 일이 있다. 그러다 1973년 인디아나 대학에서 좀 늦은 박사과정을 끝내 가실 때, 나는 플부라이트 장학생 초기 오리엔테이션을 그 캠퍼스에서 받으러 가서 여름 두 달을 함께 보냈다. 이때 이병건, 양동휘, 이정민 선생님들도 거기 몰려 계셨었다.
하버드·일리노이 대학을 거쳐 1979년 언어학 박사가 되어 귀국을 하니 서울대가 관악으로 통합되어 이전해 있었고, 나는 고려대학교에서 첫 번 교수직을 잘 시작했다가 1982년 서울대 로 옮겨 그 뒤 전 선생님을 교내에서도 쉽게 뵈었다. 1983년 2월에는 한국언어학회 산하에 세분된 전공분야 학회를 두어야겠다는 부탁에 따라 현 한국음운론학회(The Phonology- Morphology Circle of Korea)의 전신 음운론연구회(The Phonology Workshop) 창립을 주 도했다. 통사론 분야 다음번의 전문학회로 조직하면서, 처음에는 작년에 작고하신 은사 이기 문 교수님 등 국어학자들도 다수 참여하여 토대를 넓혀 주셨고, 전 선생님도 오래 기둥이 되 어 주셨다.
1985년 훔볼트 팰로우로 독일에 갔다가 돌아와 본부 교무부처장을 맡게 되면서 음운론학 회를 계속 못 나가다가 1990년대부터 다시 나가니, 전 선생님께서 한영희 교수님과 함께 기 둥 역할을 해 주고 계셨었다. 비록 중간에 사정상 긴 결석은 했지만 학회 창립자로 무한한 애 정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원로 분들이 그지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매번 강독에서 가장 적절 한 코멘트를 해 주셨고, 그런 공부하는 학자의 자세를 우리는 보고 배우며 자란 것이다. 전 선생님은 일 처리를 반듯하게 하시는 평판에 수능 학력고사 출제위원장도 몇 해씩 맡으셨다. 그때 젊은 교수들이 함께 애쓰며 합숙한 기억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특히 교무부처장으로서 연중 한 달간 합숙하며 출제 채점을 총괄하는 책임자였기에 이렇게 긴장과 엄정을 기하는 일 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는데, 아무 탈 없이 매끈하게 위원장 일을 여러 번 즐거이 해내신 것을 감탄할 뿐이다.
전 선생님은 모르는 사이 꽤 두꺼운 책들을 집필하거나 번역해 내셔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는 분이셨다. 이런 일도 아무나 흉내 내지 못할 수준과 분량의 업 적이었다. 또 나는 국어학자로서 전 선생님 박사 논문 중의 국어 자료 부분을 참고하면서 내 박사 논문을 1979년에 마쳤던 기억이 있고, 그 뒤에도 국어에 대한 고견을 많이 내주신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요즘은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전공하는 학자들이 배운 이론을 국어에 적용 해 보는 노력을 덜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선배님들의 족적을 살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전 선생님께서 이제는 편히 쉬시면서 해 놓으신 많은 연구 업적을 책장에 놓고 바라보시며 미소 지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인 박희진 교수님도 제 처의 이화여고 영어 선생님을 하셨었다니 겹으로 제자가 된 처지라 이렇게 글이라도 올려 위로를 드리고 싶다.
[음운론학회(www.phonology.or.kr/xe/download/5826)를 접속하여 첨부 파일을 열면 한 국음운론학회 초기 통지문 #8에 전상범 교수 등의 강독 활동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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