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학교와 그 주변
ANTHOLOGY
커넥셔니즘
Author
관리자
Date
2024-04-11
Views
46
80년대에 유행하는 신사고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인지과학 내지 컴퓨터 분야 등에서 쓰는 신경망(neural network)접근 방법이다. 이 방법은 굳이 主義를 붙여 명명하면 연관주의(connectionism)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단위가 조직망 속에서 그 이웃 단위들과 어떤 연관 하에 활동하는가를 파악하자는 원리다.
1992년 미국언어학회 여름학교의 한 강좌는 이 원리를 언어학 연구에도 적용하여 심지어 모음조화 현상까지 이 방법으로 설명해 보려는 내용이었다. 진정 현대 사회는 모든 요소가 다 연관성을 가지고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 방법이 나의 전공분야에까지도 삼투되어 온 것이다. 커넥셔니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그 원리가 많은 학문분야에 두루 다 영향을 끼치리라고 예견할 것이다.
일찌기 학제간(interdisciplinary)이란 용어가 유행하며 기성 학문 영역사이 사이의 빈 구역들을 탐색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빈 틈만이 아니라 접면(interface), 공유 영역을 겨냥하여 여러 종류의 합성어적 학문들이 등장했다. 전산언어학·사회언어학·심리언어학 등이 그런 예들이다.
그런데 이런 대세를 역행하여 모듈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문제를 일으킨다. 가령 나제대결을 재현하는 듯한 지역감정 문제나, 공산당이 그 종주국으로부터도 증발해 버리는 시점에 연관의식이 없이 고수되는 주체사상, 또 그를 맹종하는 일부 학생의 비연관주의적 감각은 고립과 부조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다시 학문 영역으로 돌아가서 교내의 기구가 모듈화될지도 모를 듯한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한국학을 진흥시켜 보다 많은 외국인이 이 분야를 연구하는데 참여시키자는 노력이 있어 왔다. 한때는 국제대학원이라는 기구까지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안에는 분명히 각 지역 외국 학생이 들어와 한국어도 배우고 한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제 분야를 연구할 수도 있게끔 구상되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 안은 무산되고 새로 태어난 기구가 지역연구종합센터다. 유감스럽게도 이 센터는 대외적인 각 지역만 다 망라했을 뿐 정작 한국이란 지역을 제외하였다.
물론 이미 한국문화연구소가 있고 어학연구소 한국어과정이 있다. 그러나 원래 국제대학원 구상에서 계획하였던 유기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경우도 연관주의적 비젼으로 서로 inter-institutional 프로그램을 추진해 보는 일도 필요할 듯도 하다. 아마도 그것이 모듈로서 총립된 기구만 가진 대학에 신경망을 짜 넣어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 기구를 자꾸 양산해 내지 않고도 효율적 활동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학 얘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국제교류위원회라는 기획실 관장 기구에 정작 한국학 관계 교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학문적 국제 교류에서도 수입적자만 쌓자는 것이 아니면, 당연히 한국학은 가장 대표적 수출 품목인데, 아무 회원도 이 분야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어는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 어떤 교수건 일가견이 있다고 말한다면, 국어학은 빼자(물론 이런 망발이 우리 대학 내에는 없겠지만) --그러나 국사며, 국악이며, 그 모든 전문 분야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차제에 나는 한국학을 잘 수출하는 일이 결국 우리를 세계 속에서 고립시키지 않고 조화롭게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비약적 결론을 내려두고 싶다. 그런 노력으로 나는 어학연구소에서 미국 UCLA와 호주 그리피스 대학에 한국학을 송출하기 위한 위성통신 강의를 1990년부터 실시하고 있고 곧 캐나다와 하와이나, 알래스카로도 통신망을 넓힐 구상이다.
1992년 미국언어학회 여름학교의 한 강좌는 이 원리를 언어학 연구에도 적용하여 심지어 모음조화 현상까지 이 방법으로 설명해 보려는 내용이었다. 진정 현대 사회는 모든 요소가 다 연관성을 가지고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 방법이 나의 전공분야에까지도 삼투되어 온 것이다. 커넥셔니스트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그 원리가 많은 학문분야에 두루 다 영향을 끼치리라고 예견할 것이다.
일찌기 학제간(interdisciplinary)이란 용어가 유행하며 기성 학문 영역사이 사이의 빈 구역들을 탐색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빈 틈만이 아니라 접면(interface), 공유 영역을 겨냥하여 여러 종류의 합성어적 학문들이 등장했다. 전산언어학·사회언어학·심리언어학 등이 그런 예들이다.
그런데 이런 대세를 역행하여 모듈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문제를 일으킨다. 가령 나제대결을 재현하는 듯한 지역감정 문제나, 공산당이 그 종주국으로부터도 증발해 버리는 시점에 연관의식이 없이 고수되는 주체사상, 또 그를 맹종하는 일부 학생의 비연관주의적 감각은 고립과 부조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다시 학문 영역으로 돌아가서 교내의 기구가 모듈화될지도 모를 듯한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한국학을 진흥시켜 보다 많은 외국인이 이 분야를 연구하는데 참여시키자는 노력이 있어 왔다. 한때는 국제대학원이라는 기구까지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안에는 분명히 각 지역 외국 학생이 들어와 한국어도 배우고 한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제 분야를 연구할 수도 있게끔 구상되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 안은 무산되고 새로 태어난 기구가 지역연구종합센터다. 유감스럽게도 이 센터는 대외적인 각 지역만 다 망라했을 뿐 정작 한국이란 지역을 제외하였다.
물론 이미 한국문화연구소가 있고 어학연구소 한국어과정이 있다. 그러나 원래 국제대학원 구상에서 계획하였던 유기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경우도 연관주의적 비젼으로 서로 inter-institutional 프로그램을 추진해 보는 일도 필요할 듯도 하다. 아마도 그것이 모듈로서 총립된 기구만 가진 대학에 신경망을 짜 넣어 생기를 불어 넣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 기구를 자꾸 양산해 내지 않고도 효율적 활동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학 얘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국제교류위원회라는 기획실 관장 기구에 정작 한국학 관계 교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학문적 국제 교류에서도 수입적자만 쌓자는 것이 아니면, 당연히 한국학은 가장 대표적 수출 품목인데, 아무 회원도 이 분야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어는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 어떤 교수건 일가견이 있다고 말한다면, 국어학은 빼자(물론 이런 망발이 우리 대학 내에는 없겠지만) --그러나 국사며, 국악이며, 그 모든 전문 분야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차제에 나는 한국학을 잘 수출하는 일이 결국 우리를 세계 속에서 고립시키지 않고 조화롭게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비약적 결론을 내려두고 싶다. 그런 노력으로 나는 어학연구소에서 미국 UCLA와 호주 그리피스 대학에 한국학을 송출하기 위한 위성통신 강의를 1990년부터 실시하고 있고 곧 캐나다와 하와이나, 알래스카로도 통신망을 넓힐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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