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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국민학교 이야기---이상억 교수의 '동국제강' 사보 기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10-04
조회
79
동국제강 본사가 1974년이후 자리 잡은 수하동의 현 사옥은 역사가 깊은 곳으로서 과거에 무엇을 하던 곳인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다행히 동국제강은 과거에 세워진 학교 3층 건물 및 강당의 원구조와 교정(校庭) 모습을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울 시내 최중심부에서 이만큼 옛 건물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최근 Ferrem Tower를 신축, 2010년 8월 입주]110년 역사 이어온 건물
현 중구 을지로입구 수하동 50(64로도 나옴)번지 일대 옛 청계국민학교 자리에는 조선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가 있었다. 도화서는 그림의 교수(敎授), 고시(考試), 제조, 보관 등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처음에는 도화원(圖畵院)이라 했다가 후에 도화서라고 개칭했다.
청계국민학교의 전신인 수하동소학교가 시작된 것이 110년전 1895년 9월 10일이다. 110년은 웬만한 흔적은 사라지는 긴 세월이다. 필자는 미국에서 5년 공부, 호주에서 4년 교수를 했었기에 그런 역사가 짧은 나라들에서는 110년이라면 특히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청계국민학교의 1957년 48회 졸업생으로 이 글을 쓰게 되어 동국제강이 옛 학교의 골격을 그대로 보존해 온 일이 고맙기 그지없다.
또 필자는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 이승업가(옛날 찻집)의 원 위치인 삼각동 36번지(수하동 북쪽 건너편)에서 이 학교를 다녔고, 집안에서 아버님을 비롯한 7분 삼촌, 우리 4남매가 다같은 졸업생인 까닭에 더욱 의의가 깊다.
아버님(李暎雨)께서는 1917년생(현재 88세)이며, 1924년 4월 수하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4년제로 교무실 1개, 교실 8개의 일본식 목조 단층집 일자형(一字形) 교사였다. 1930년 3월 졸업까지 5, 6학년이 더 생기고 각 학년 2반씩 증설, 교실도 12개가 되어 T자형(T字形) 2층집으로 1928년 이전에 증축되었다 하셨다.
학생은 남자만으로 구성되었고 조선어(1주 약 3회), 국어(일본어), 산술, 수신(도덕), 도화, 습자, 음악, 체조 등의 과목이 있었으나 사회, 자연은 별도로 가르쳐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셨다. 이 자리에 3층 ㄱ자형(ㄱ字形) 현교사의 골격이 선 때는 30년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학교 북측 삼각동과 면한 소위 소광교(小廣橋) 길은 복개 전이어서 개천물 흐르는 것이 보였으나 운동장 앞 정문 쪽 동측 길(현 외환은행으로 가는 길) 개천은 이미 복개가 되어 물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다. 아버님의 설명대로 당시 학교와 그 주변을 그려 보면 우측 그림과 같다. [도면은 이 자료실 기능상 복사 전재가 안 됨.]
청계국민학교의 간략한 역사
1895년 8월 1일부터 ‘소학교령’이 시행되면서 한성에는 수하동소학교(水下洞小學校)를 비롯해 8개의 관립소학교가 세워지게 되어, 9월 10일 서울 중구 수하동 50번지, 옛 ‘도화서’터에 수하동소학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수하동공립보통학교라는 명칭으로 개교했고, 1930년 9월 1일 청계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941년 3월 31일 일왕의 칙령 ‘국민학교령’에 의해 학교 명칭이 청계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1956년 2월 9일에 개칭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국학자 자산(自山) 안확(安廓 1886~1946)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인재들이 교육받았던 터전이었다.
청계국민학교는 1969년 2월 5일 제60회 졸업식을 끝으로 졸업생 1만440명을 배출하고 남은 학생은 1969년 11월 5일 도심지 개발에 따른 학생수 감소로 폐교하면서 분리 수용되었다. 현재 졸업대장은 남산초등학교에서 보관하면서 증명서 발급 사무를 대행하고 있다. 그 뒤 25년이 지나 1990년 11월 7일 노원구 중계3동 513-1에 교사를 착공하여 1991년 10월 30일 서울청계국민학교(교명계승) 설립을 인가받았다. 1992년 5월 6일 서울청계국민학교 개교식이 있었고 1996년 3월 1일 청계국민학교를 청계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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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국민학교…최초 건립된 학교 중 하나 [특별기고] 2005-09-08
동국제강 본사 건물은 오는 9월 10일이면 건립 110주년을 맞는다. 청계초등학교 졸업생인 이상억 교수는 지난 6월 본사를 직접 방문하고 둘러 보았다고 한다. 지난 호에 이어 이교수의 방문 소감과 재학 당시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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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국민학교 이야기<2> "청개구리들아~"
기본 건물 구조는 예전 그대로
첫 방문은 지난 6월 9일, 먼저 동국제강 총무팀장과 연락을 했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다. 어찌나 반갑던지, 물론 리모델링해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 구조는 그대로였다. 식당도 강당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운동장 역시 그대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정문이 옛날엔 학교 뒷문이었다는 점이다. 학교 운동장쪽 문이 당시엔 정문이었다. 지금과 앞 뒤가 바뀌어 있다는 것이 새롭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
지난 6월 초에 뉴욕에 살던 동창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48년 만에 모임을 가졌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인터넷으로 학교를 검색해 보았더니 ‘최초 건립된 학교 중 하나’라고 소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모임을 계기로 청계초등학교(이하 당시 명칭인 ‘국민학교’ 사용)의 역사적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창들은 “그 정도의 역사면 해외에서는 유적지로 보존됐을 것”이라며, 모두 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학교 뒤로 소광교 개천이 흘렀고, 현재 조흥은행 본점 앞이 대광교로 그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 바로 삼각동이다. 우리 집은 삼각동에 있었다. 현재 조흥은행 100년 기념관 주차장 터다. 문화재처럼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 간 뒤로 가끔 그 앞을 통해 지나가 볼 기회가 있었다.
학교는 69년에 폐교됐고, 70년대 미국 유학시기를 제외하고는 2~3년에 한 번씩 간간히 수하동 근처를 방문했기 때문에 동국제강이 사용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동국제강 사옥에 대한 뉴스를 감명 깊게 본적이 있다. 현장(설비)에 투자하기 때문에 본사 건물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청계국민학교는 서울 톱 10이내 수준
우리 집안이 모두 수하동, 장교동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만도 청계국민학교 졸업생이 20여명이상이나 된다. 나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아버지 형제 8분도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이다.
당시 청계국민학교는 그냥 보통 학교 중에 하나였다. 조선말 남산골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곳이었고, 계동 등 경복궁 인왕산 사이 지역에 부유층이 있었다. 특히 당시 수하동과 삼각동은 상인들과 기능인들이 많았다. 그리 부자동네는 아니었다.
당시 50년대는 덕수국민학교가 유명했다. 수송국민학교(이 곳도 현재 종로구청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도 좋은 학교에 속했다. 청계국민학교 졸업생이 경기고에 7명정도 들어갔다. 덕수 같은 경우 40명정도 됐을 것이다. 그 정도면 시내 톱 10 안에 드는 학교가 아니었을까?
사방팔방 훤히 보였던 시내 중심가
‘청계’란 이름은 역시 개천 이름이다. 옛날엔 다른 학교가 있는 지역엔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타 학교 학생들과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학교와 학교 사이에는 접경지대가 있었다. 접경지대에 있던 학교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 곳에서 서로 마주치면 늘 싸웠다. 주변 학교 아이들은 우리 보고 “청개구리들아~”라고 놀렸고 주로 마주쳤던 방산국민학교 아이들에게 “방구쟁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난다.
50년대는 학교시설이 열악했지만 자연하고 가까웠다. 지금 같은 건물이 없었으니 가는 길도 쉬웠다. 수업이 끝나면 남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갔고, 중간에 명동성당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지금 외환은행 자리는 척식회사로 일제 수탈기관이 있었다. 중간에 내무부가 있다가 외환은행이 들어선 것이다.
명동에는 성당 외에 그렇다할 큰 건물들이 없었다. 2층정도의 상점들만 즐비했다. 종로 쪽은 화신백화점정도만 있었고 광화문도 훤했다. 간혹 화신백화점에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던 기억도 난다. 사실 명동은 일본사람들이 만든 동네였다. 비만 오면 질퍽했던 기억이 난다. 명동을 옛날엔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충무로는 일본인들만 살던 곳으로 50년대엔 상당히 발달된 곳이었다. 종로는 한국의 상인들, 즉 육의전이 있던 한국전통 상점이 밀집한 곳이다. 사람들은 주로 종로에 살았다. 당시엔 사방팔방으로 건물이 즐비한 지금보다는 쉽게 다녔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잘 한 것 같다. 예전엔 지금같이 그렇게 넓지 않았고 더 좁았다. 50년대엔 그 곳에서 빨래도 했다. 그러다 하수구가 많이 생기면서 물이 더러워졌다. 50년대엔 특이하게 광교에 땅꾼들이 살았다. 살모사를 잡아 전시도 해놓고 끓여 먹기도 하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교건물 주변에 그대로 남아있는 가게는 하동관 곰탕집이다. 이 곳은 아마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됐을 것이다. 내가 44년생이니까 1930년쯤에 생겼나? 주인을 찾아 봤는데 지금은 친척이 맡아서 하고 있단다. 요즘도 옛날 방식 그대로 아침에 끓인 진국으로 만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학교 건물 맞은 편에는 대성관 곰탕집이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집으로 유명했다. 그 집 주인 아들과 동창이었다. 개성상회도 정말 오래된 가게였는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지금은 스타벅스가 생겼다.
그리고 청계국민학교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국제강 사옥. 삼각동 개발로 건물이 다시 들어설 것이라고 들었다.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하는데, 그게 안 되면 한 귀퉁이나 강당이라도 남겨졌으면 좋겠다. 개발이야 어쩔 수 없지만 부디 옛 것을 잘 살리면서 개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히 동국제강은 과거에 세워진 학교 3층 건물 및 강당의 원구조와 교정(校庭) 모습을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울 시내 최중심부에서 이만큼 옛 건물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최근 Ferrem Tower를 신축, 2010년 8월 입주]110년 역사 이어온 건물
현 중구 을지로입구 수하동 50(64로도 나옴)번지 일대 옛 청계국민학교 자리에는 조선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가 있었다. 도화서는 그림의 교수(敎授), 고시(考試), 제조, 보관 등 그림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처음에는 도화원(圖畵院)이라 했다가 후에 도화서라고 개칭했다.
청계국민학교의 전신인 수하동소학교가 시작된 것이 110년전 1895년 9월 10일이다. 110년은 웬만한 흔적은 사라지는 긴 세월이다. 필자는 미국에서 5년 공부, 호주에서 4년 교수를 했었기에 그런 역사가 짧은 나라들에서는 110년이라면 특히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청계국민학교의 1957년 48회 졸업생으로 이 글을 쓰게 되어 동국제강이 옛 학교의 골격을 그대로 보존해 온 일이 고맙기 그지없다.
또 필자는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 이승업가(옛날 찻집)의 원 위치인 삼각동 36번지(수하동 북쪽 건너편)에서 이 학교를 다녔고, 집안에서 아버님을 비롯한 7분 삼촌, 우리 4남매가 다같은 졸업생인 까닭에 더욱 의의가 깊다.
아버님(李暎雨)께서는 1917년생(현재 88세)이며, 1924년 4월 수하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4년제로 교무실 1개, 교실 8개의 일본식 목조 단층집 일자형(一字形) 교사였다. 1930년 3월 졸업까지 5, 6학년이 더 생기고 각 학년 2반씩 증설, 교실도 12개가 되어 T자형(T字形) 2층집으로 1928년 이전에 증축되었다 하셨다.
학생은 남자만으로 구성되었고 조선어(1주 약 3회), 국어(일본어), 산술, 수신(도덕), 도화, 습자, 음악, 체조 등의 과목이 있었으나 사회, 자연은 별도로 가르쳐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셨다. 이 자리에 3층 ㄱ자형(ㄱ字形) 현교사의 골격이 선 때는 30년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학교 북측 삼각동과 면한 소위 소광교(小廣橋) 길은 복개 전이어서 개천물 흐르는 것이 보였으나 운동장 앞 정문 쪽 동측 길(현 외환은행으로 가는 길) 개천은 이미 복개가 되어 물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다. 아버님의 설명대로 당시 학교와 그 주변을 그려 보면 우측 그림과 같다. [도면은 이 자료실 기능상 복사 전재가 안 됨.]
청계국민학교의 간략한 역사
1895년 8월 1일부터 ‘소학교령’이 시행되면서 한성에는 수하동소학교(水下洞小學校)를 비롯해 8개의 관립소학교가 세워지게 되어, 9월 10일 서울 중구 수하동 50번지, 옛 ‘도화서’터에 수하동소학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수하동공립보통학교라는 명칭으로 개교했고, 1930년 9월 1일 청계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941년 3월 31일 일왕의 칙령 ‘국민학교령’에 의해 학교 명칭이 청계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1956년 2월 9일에 개칭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국학자 자산(自山) 안확(安廓 1886~1946)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인재들이 교육받았던 터전이었다.
청계국민학교는 1969년 2월 5일 제60회 졸업식을 끝으로 졸업생 1만440명을 배출하고 남은 학생은 1969년 11월 5일 도심지 개발에 따른 학생수 감소로 폐교하면서 분리 수용되었다. 현재 졸업대장은 남산초등학교에서 보관하면서 증명서 발급 사무를 대행하고 있다. 그 뒤 25년이 지나 1990년 11월 7일 노원구 중계3동 513-1에 교사를 착공하여 1991년 10월 30일 서울청계국민학교(교명계승) 설립을 인가받았다. 1992년 5월 6일 서울청계국민학교 개교식이 있었고 1996년 3월 1일 청계국민학교를 청계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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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국민학교…최초 건립된 학교 중 하나 [특별기고] 2005-09-08
동국제강 본사 건물은 오는 9월 10일이면 건립 110주년을 맞는다. 청계초등학교 졸업생인 이상억 교수는 지난 6월 본사를 직접 방문하고 둘러 보았다고 한다. 지난 호에 이어 이교수의 방문 소감과 재학 당시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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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국민학교 이야기<2> "청개구리들아~"
기본 건물 구조는 예전 그대로
첫 방문은 지난 6월 9일, 먼저 동국제강 총무팀장과 연락을 했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다. 어찌나 반갑던지, 물론 리모델링해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 구조는 그대로였다. 식당도 강당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운동장 역시 그대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정문이 옛날엔 학교 뒷문이었다는 점이다. 학교 운동장쪽 문이 당시엔 정문이었다. 지금과 앞 뒤가 바뀌어 있다는 것이 새롭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
지난 6월 초에 뉴욕에 살던 동창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48년 만에 모임을 가졌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인터넷으로 학교를 검색해 보았더니 ‘최초 건립된 학교 중 하나’라고 소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모임을 계기로 청계초등학교(이하 당시 명칭인 ‘국민학교’ 사용)의 역사적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창들은 “그 정도의 역사면 해외에서는 유적지로 보존됐을 것”이라며, 모두 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학교 뒤로 소광교 개천이 흘렀고, 현재 조흥은행 본점 앞이 대광교로 그 두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 바로 삼각동이다. 우리 집은 삼각동에 있었다. 현재 조흥은행 100년 기념관 주차장 터다. 문화재처럼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 간 뒤로 가끔 그 앞을 통해 지나가 볼 기회가 있었다.
학교는 69년에 폐교됐고, 70년대 미국 유학시기를 제외하고는 2~3년에 한 번씩 간간히 수하동 근처를 방문했기 때문에 동국제강이 사용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동국제강 사옥에 대한 뉴스를 감명 깊게 본적이 있다. 현장(설비)에 투자하기 때문에 본사 건물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청계국민학교는 서울 톱 10이내 수준
우리 집안이 모두 수하동, 장교동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만도 청계국민학교 졸업생이 20여명이상이나 된다. 나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아버지 형제 8분도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이다.
당시 청계국민학교는 그냥 보통 학교 중에 하나였다. 조선말 남산골은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 곳이었고, 계동 등 경복궁 인왕산 사이 지역에 부유층이 있었다. 특히 당시 수하동과 삼각동은 상인들과 기능인들이 많았다. 그리 부자동네는 아니었다.
당시 50년대는 덕수국민학교가 유명했다. 수송국민학교(이 곳도 현재 종로구청이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도 좋은 학교에 속했다. 청계국민학교 졸업생이 경기고에 7명정도 들어갔다. 덕수 같은 경우 40명정도 됐을 것이다. 그 정도면 시내 톱 10 안에 드는 학교가 아니었을까?
사방팔방 훤히 보였던 시내 중심가
‘청계’란 이름은 역시 개천 이름이다. 옛날엔 다른 학교가 있는 지역엔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타 학교 학생들과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학교와 학교 사이에는 접경지대가 있었다. 접경지대에 있던 학교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 곳에서 서로 마주치면 늘 싸웠다. 주변 학교 아이들은 우리 보고 “청개구리들아~”라고 놀렸고 주로 마주쳤던 방산국민학교 아이들에게 “방구쟁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난다.
50년대는 학교시설이 열악했지만 자연하고 가까웠다. 지금 같은 건물이 없었으니 가는 길도 쉬웠다. 수업이 끝나면 남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갔고, 중간에 명동성당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지금 외환은행 자리는 척식회사로 일제 수탈기관이 있었다. 중간에 내무부가 있다가 외환은행이 들어선 것이다.
명동에는 성당 외에 그렇다할 큰 건물들이 없었다. 2층정도의 상점들만 즐비했다. 종로 쪽은 화신백화점정도만 있었고 광화문도 훤했다. 간혹 화신백화점에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던 기억도 난다. 사실 명동은 일본사람들이 만든 동네였다. 비만 오면 질퍽했던 기억이 난다. 명동을 옛날엔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충무로는 일본인들만 살던 곳으로 50년대엔 상당히 발달된 곳이었다. 종로는 한국의 상인들, 즉 육의전이 있던 한국전통 상점이 밀집한 곳이다. 사람들은 주로 종로에 살았다. 당시엔 사방팔방으로 건물이 즐비한 지금보다는 쉽게 다녔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잘 한 것 같다. 예전엔 지금같이 그렇게 넓지 않았고 더 좁았다. 50년대엔 그 곳에서 빨래도 했다. 그러다 하수구가 많이 생기면서 물이 더러워졌다. 50년대엔 특이하게 광교에 땅꾼들이 살았다. 살모사를 잡아 전시도 해놓고 끓여 먹기도 하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교건물 주변에 그대로 남아있는 가게는 하동관 곰탕집이다. 이 곳은 아마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됐을 것이다. 내가 44년생이니까 1930년쯤에 생겼나? 주인을 찾아 봤는데 지금은 친척이 맡아서 하고 있단다. 요즘도 옛날 방식 그대로 아침에 끓인 진국으로 만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학교 건물 맞은 편에는 대성관 곰탕집이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집으로 유명했다. 그 집 주인 아들과 동창이었다. 개성상회도 정말 오래된 가게였는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지금은 스타벅스가 생겼다.
그리고 청계국민학교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국제강 사옥. 삼각동 개발로 건물이 다시 들어설 것이라고 들었다.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하는데, 그게 안 되면 한 귀퉁이나 강당이라도 남겨졌으면 좋겠다. 개발이야 어쩔 수 없지만 부디 옛 것을 잘 살리면서 개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