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견문록
ANTHOLOGY
에게해의 10일간
Author
관리자
Date
2024-03-19
Views
143
2004년 7월 23일부터 8월 1일까지 꼬박 10일간 오래만에 <홀로걷기>여행에 나섰다. 모든 일을 홀로서기로 해결하려면 힘은 들지만 단체 행동에 따르는 번거로움은 없어서 한결 생각하며 여행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나 자신만을 위한 여행을 하게 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것은 맨 끝에서 밝히기로 한다.
내가 에게해의 섬들을 여행하려고 작정한 것은 80년부터니까 4반세기만에 실행에 옮기게 된 셈이다. 80년 당시 호주 수도 캔베라의 호주국립대에서 호주 최초의 한국어 과정을 창설하면서, 아침마다 공관의 김 영사와 테니스도 치게 되었는데 그분의 전임지가 아테네여서 주말마다 섬들을 둘러 보니 아주 좋았다는 유혹적 정보를 들었던 것이다.
이 개인 여정에 앞서, <14차 국제한국언어학회>를 7월 12-16일간 터키 안탈랴 근처 앙카라대학 소유 해변 휴양호텔에서 개최하고, 17일 이후 내가 오래 전부터 면밀히 계획해 온 전체 일정대로, 터키의 파묵칼레, 그리스의 메테오라 등지를 같이 둘러 보았다. 그 동안 두 나라 사이를 건너며 약한 파도에도 멀미하느라 고생한 일부 회원 등 전체 일행과 작별하고, 23일 이후는 섬 사이를 각종 배로만 이동하였다.
일정은 서울에서 인터넷으로 배 시간을 찾아 짰는데, 배표 구입만은 현지에 와서 받을 수 있게 아테네 한국여행사에 부탁했다. 원래 학회 회원 중 정보를 알려 달라는 분들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여행 안내책자에 나오는 내용은 여기에 반복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른 내역만을 좀 상세히 밝혀 드리자면 아래와 같다. 각 숙박지에 호텔도 잡아 주도록 부탁했으나, 올림픽 직전이라는 이번 상황이 아니면, 부두에 내려 직접 해결하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23/JUL:From Piraeus to Heraklion: 49.50
26/JUL:From Heraklion to Santorini: 14.50
28/JUL:From Santorini to Paros: 11.40
29/JUL:From Paros to Naxos:9.60
30/JUL:From Naxos to Mykonos:8.50
01/AUG:From Mykonos to Piraeus: 19.00 TOTAL EURO 112.50
우선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로 찾아 나가는 데에만 3개 버스를 환승하고서야 10개의 승선장 중의 하나를 제대로 찾아 내었다. Minoan Line의 highspeed ferry는 거함답지 않게 쾌속으로 지중해의 거울 같은 물결 위를 달려 나갔다. 수면이 너무 잔잔해서 깨고 나가는 행위 자체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포세이돈 신의 아침 찻잔 속을 헤치고 나가다 무엄하다는 말을 듣지나 않을지... 그러나 바다는 시종 정말 너무 고요하였다.
수영장 등 여러 시설을 둘러 보며 배 속을 누비고 다녀도 동양인은 나 하나밖에 뜨이지 않았다. 정말 지중해의 이방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작열하는 태양볕 밑에 있자니 까뮈의 충동적 느낌을 공감할 수 있는것 같았다. 이렇게 멍해지고 있을 때 머리를 치며 떠오르는 한 마디:“아빠, 너무 태워 가지고 오면 집에 못 들어 와요!’’
첫 기착지인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항에 6시간만에 도착하였다. 이 섬은 그리스만이 아니라 옛 동로마제국과 베니스공국, 아랍, 오토만 터키, 독일, 영국 등이 교차로 점령해 온 동지중해의 한 가운데 있는 요충지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미노아 문명이 크노소스 궁전 등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이 궁전은 약 3,700년전에 이미 4 개 층으로 된 구조로 지어졌고 아마 1,200실 이상의 방들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돌로 된 뼈대가 잘 남아 있어 우리의 목조 2층이 고작이고 몇 백년 되지 않는 문화재와는 보존력이 현저히 달랐다.
크레타에서는 섬이 커서 3일을 배당해 둘러 보았는데, 레팀논과 하나, 이 2 도시를 보는데하루 또 말리아와 아기나-니콜라스쪽으로 둘러보는데 하루가 걸렸다. 말리아라는 유적지로 가는 연변에는 유도화(유엽도)가 흐드러지게 피어 큰 가로수로 자라 있었다. 우리가 방안에서 기르는 크기와는 영 달랐다. 그런데 이곳을 운행하는 버스가 벤츠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기사가 차장 외에도 친구까지 앞쪽에 태우고 가면서 떠들어대는데 정신이 없어 안전할까 걱정이 되었다. 동네 곳곳을 들리며 친구가 길에서 보이면 클랙션으로 인사를 하고 연신 담배까지 피워대니 참 가관이었다. 그래도 버스는 앞 유리가 2x1.5m의 통유리로 된 최신 벤츠제품이었다. 에게섬들의 버스가 미코노스섬만 빼고는 모두 이렇게 최신형으로 구비되어 있어 과연 관광 우선 국가다웠다.
이라클리온의 숙소였던 Astoria Hotel 옆 고고학 박물관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 사실이 하나 있다. 미노아 문명에서 생산 사용한 붉은 토기의 기하학적 문양 중에 과 똑같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에 기호로 주어지지 않은 것들은 뒤에 인쇄할 때 그려서 보이기로 한다.) 이미 4천년전에, 근래에야 우리가 여러 집단의 상징으로 쓰고 있는 대부분의 기호들이 다 발명되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불교의 만자 卍 형태가 이미 이 때에 보이며 역시 이 형태의 변형인 나치의 스와스티카(만자 획의 방향 Z가 아니라 반대로 S의 방향)도 같이 쓰이고 있었다. 불교나 나치 모두 채택연대가 한참 뒤니 원형이 크레타에서부터 전파된 것이라고 해석함이 옳겠다.
이밖에도 불교에서 윤회 사상의 표상으로 쓰는 팔등분된 원의 형태와 심지어 연화문도 이미 나타나 있고, 반전 평화주의 운동에 쓰이는 4등분된 원도 역시 이때 익히 쓰였던 것이다. 대개 BC 8-7 세기간의 적색 토기 유물들 중 기하학적 문양을 가진 것들은 한 부분에 위의 모양들을 장식으로 그려 넣었다. 더구나 유태인이 자기들 상징으로 쓰는 육각의 별(데이비드의 별)까지 BC 19-17 세기의 크레타 Phaistos지역 유물 중 clay sealing(도장을 파서 진흙에 눌러 그 굳는 것을 밀초처럼 봉한 것)에 나타나고 있었다. 토기 외에도 상자나 문을 봉할 때에 이미 다 쓰여지고 있었다.
물론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획의 조합 가능성은 빤한 것이어서 먼저 발명해 쓰는 사람이 이런 문양들을 다 만들어 쓰기 쉽지 않았겠느냐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온 청동기나 금세공 등 문명의 수준으로 보거나, 뒤에 본 다른 섬들의 박물관 소장품들로 보아 이 이상의 영예라도 당연히 돌려주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미 생활에 상당한 여유가 있어서 그릇을 이와 같이 다양하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의 신라 토기만해도 몇 천년 뒤인데도 이런 수준이 아니었다.
각 곳의 박물관 직원들도 이 사실을 잘 몰라서 내가 설명을 해 주고, 다음부터 자랑스럽게 안내를 하라고 했더니 관련자료를 복사까지 해 주며 아주 좋아 하였다. 이밖에도 불교에서 윤회 사상의 표상으로 쓰는 팔등분된 원의 형태와 심지어 연화문도 이미 나타나 있고, 반전 평화주의 운동에 쓰이는 4등분된 원도 역시 이때 익히 쓰였던 것이다. 대개 BC 8-7 세기간의 적색 토기 유물들 중 기하학적 문양을 가진 것들은 한 부분에 위의 모양들을 장식으로 그려 넣었다. 더구나 유태인이 자기들 상징으로 쓰는 육각의 별(데이비드의 별)까지 BC 19-17 세기의 크레타 Phaistos지역 유물 중 clay sealing(도장을 파서 진흙에 눌러 그 굳는 것을 밀초처럼 봉한 것)에 나타나고 있었다. 토기 외에도 상자나 문을 봉할 때에 이미 다 쓰여지고 있었다. 이 크레타 봉인의 사용과 유태인의 구약시대 중 누가 먼저인지는 좀 따져 봐야겠지만... 이 주제에 몰입하다 보니 증거가 보일 때마다 찍느라고 이후 필름을 꽤나 쓰게 되었다.
크레타 이라클리온에는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념관과 무덤도 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 종교상 파문까지도 감내하며 독일에서 살아야 했던 그이의 자취가 있다. 또 스페인 톨레도에서 엘그레코의 그림이 모여 있는 옛집 및 그의 걸작 '오르가스백작의 장례식'이 전시되어 있는 산토토메교회 등을 관광했었는데, 바로 그가 이곳 출신의 그리스 화가였다.
나의 꿈의 항해는 산토리니로 계속 순항하고 있었다. 달력에서 보던 섬, 그 파란 돔형 지붕에 흰벽 교회며 집들. 그리스의 국기 색을 그대로 칠해 놓은 올망졸망한 집들. 이런 것들을 연상하며 배가 섬에 접근할 무렵 나는 다시 놀라고 있었다. 아, 그 집들은 마치 눈이 온 것처럼 저 절벽위에 사풋히 흰 띠로 앉아 있고, 그 아래 바다에서 직벽으로 뻗어 오르며 펼쳐진 화산암석의 장관은 그랜드 캐년과 다름이 없었다. 콜로라도 강이 아니라 에게 바다가 밑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백두산 천지가 바다에 빠져 있는 형상이다. 규슈 아소산의 육상 칼데라(Caldera)보다는 좀 작을 듯 어림 짐작되지만, 이곳은 마그마 분출 후 그 빈 공간으로 산체가 바다 속에 함몰된 뒤 다시 급경사의 내측벽이 침식된 특이한 반원형 분지다. 한국에서는 남해 거문도에 가서 아주 작지만 바다에 함몰된 칼데라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실제 산토리니섬은 화산 칼데라의 적갈색 단애가 둥그렇게 보이는 초대형 분화구 안쪽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접근법이 가장 장관이라 하겠다. 만약 정말 광적으로 배를 싫어 해서 비행기를 타고 가야겠다면 그런 촌사람을 위해 산토리니에도 아주 평평한 변두리 쪽에 비행장이 있기는 하다. 서양인들이 평생 모은 돈을 축내 타는 선망의 수만톤급 크루즈 선들이 거대한 절벽 밑에 작은 모형배처럼 떠있는 내해는 한 폭의 그림이다. (일정한 프로그램대로 진행되는 크루즈는 한국사람이 타기에는 댄스나 카지노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별로 맞지를 않는다.)
아마 산토리니(또는 시라)섬은 지구상에서 달리 보기 어려운 경치가 아닐 수 없다. 터키와 그리스의 관광지가 대개 지진과 전화로 허물어진 유적지가 많지만, 그리고 용케도 그런 모습을 그대로 둔 채 많은 관관객을 불러 모으지만, 산토리니만은 이 일대에서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메테오라와 함께 꼭 보아야 할 특이한 자연 경관 중의 하나다.
그런데 자연 경관 자체만이 아니라 내가 산토리니에서 또 놀란 것은, 그 남부지역 아크로티리에서 BC 6,000-100년전 유물이 60m의 화산재에 묻혀 있다가 1967년부터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에 미노아의 문양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풍설에는 이 섬이 플라톤이 말한 사라진 아틀란티스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지만, 하여튼 과거에 대단한 문명이 자생 또는 상륙해 있었던 곳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또 눈에 띄는 것은 호주에 많은 유칼립터스 나무가 기후 조건이 비슷한 여기에도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캘리포니아에 갔을 때 LA 근처에도 보이는 유칼립터스를 호주에서 옮겨온 것이라 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여기 원래 자생하는 듯한 이 많은 나무는 어떻게 된 것인가?
산토리니는 적어도 4개로 나눠진 섬을 보기 위해 하루 관광코스를 가담해야 교통편이 해결된다. 나는 대개 이런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내가 수집한 정보대로 시간 배정을 마음대로 하며 단독여행을 하는데, 이 때만은 할 수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해상 온천욕을 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페이스를 늦출 수 밖에 없었다. (역시 한 사람뿐인 동양인은 수영복을 안 가져 갔었다.) 그런데 이 단체여행은 집합 시간에 모두 칼 같이 맞춰 수십명이 잘도 움직였다. 물론 배를 타고 내릴 때 대개 같은 자리에 가 앉게 되는데, 한번은 Chevy Dealer가 공짜로 준 셔쓰를 입은 미국녀석이 내 자리를 차지했길래 비키라했더니 딴 사람도 좀 바꿔 앉았으니 안 되겠다는 것이다. 남의 자리를 함부로 차지하는 기막힌 일이 이라크 말고 여기서도 벌어지는구나 싶었다.
땡볕 밑에서 아직도 땅 속에서는 김이 나는 분화구 중앙섬 등을 둘러보고 나면, 하루 일정 끝에 이오라는 서쪽 단애 위의 도시에서 석양을 맞게 한다. 전날 피라라는 중심 도시에서 본 것과 또 다른 각도에서 그 끓던 붉은 해가 신들의 고향으로 끌려 들어가듯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도 카스트로라는 레스토랑에서 자리 값을 약간 포함한 음식을 시켜 먹었다.
산토리니는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작품이 나올 것 같다. 푸른색도 농도를 조금씩 달리 하는 하늘, 지붕, 바다, 그리고 하얀 집, 절벽의 적갈색 스펙트럼; 어느 때고 은퇴 후에 화판을 둘러 메고 와야지... 여기보다 좋은 풍경화, 산수화를 어디서 구하랴!
그렇지만 이 섬에서 겨울에는 춥고 바람이 심해, 노인만 남고 젊은이들은 본토인 반도로 이동한다고 한다. 여름 한 철은 돈 벌러 돈 쓰러 온 인간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다음 행선지는 조금 덜 알려진 파로스섬이다. 산토리니 이후부터 방문지는 모두 본래 키클라데스(희랍어로 사이클 ’바퀴’의 뜻) 제도라고 하여 바퀴 모양으로 모여있는 섬들이다. 사실은 이 섬과 옆의 낙소스섬을 하루씩 보는 대신 터키 쪽의 로도스섬을 가보려 했으나 너무 떨어져 있어서 직행선이 없어 운항일정에 넣지 못했다. 파로스에서는 섬 중앙 레프케스란 산동네로 가서 풍차도 보았는데 산골 동네 골목길도 모두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이곳에선 서양인들이 장기 휴양하는 한적한 나우사 옆 해변 지역의 호텔에서 잤는데 우연히 덤으로 뒷산에서 Michenean Acropolis를 보게 되었다. 여기가 북쪽의 펠로포네소스 반도에 중심을 둔 미케네 문명과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이 서로 교차되는 지역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낙소스섬은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서, 파로스를 제외한 다른 섬들처럼 돌산에 올리브 나무와 가시덤불만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여기서 숲이라고 해 봐야 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수종이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항구의 한편 언덕에 거대한 돌문이 서있어서 인상적이었는데 뒤에 나올 신성한 델로스섬을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아피란토스라는 내륙까지 들어가 보았고 아기나-프로코피오스란 휴양지 해변 호텔에 묵었다. 독일 휴양객들이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많이 오는데, 떠날 때 주인이 아이들이 커서 또 자기 집을 찾도록 해 달라는 장면이 참으로 정겹게 보였다.
잠시 다른 얘기 좀 하자면, 이제까지 내 배낭은 아테네에서 일행과 작별하던 아침에 회원 여러분이 고맙게 남겨주신 깻잎 4, 정어리 3, 참치 3, 김치 2 깡통, 고추장 대/소, 김 6 봉지가 담겨 있었다. 큰 백을 전날 이미 여행사 지사장에게 맡겨 버린 뒤라, 그냥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떠났더니 꽤 무게가 나갔다. 산토리니섬에서 중국집을 한번 만나 흰밥(우리 백반 팩만은 못하다)을 사서 같이 먹어보았지만 좀처럼 줄지를 않았다. 그래서 개발한 방법인데 생선 깡통을 깻잎에 싸서 먹으면 괜찮은 궁합이다. 특히 정어리와 깻잎이 잘 맞아 함께 소비가 잘 되었다. 여행 중에는 입에 당기는 음식을 눈치껏 찾아 먹으며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징어젓까지 해 먹으며 다닐 수 있는 비법은 특별히 부탁하는 분께만 공개하겠다.)
마지막 2박 예정으로 미코노스섬으로 향하였다. 이 섬은 아테네에서 가깝고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서 그런지 젊은이로 비치가 북적대고 항구도시도 길이 좁아 복잡했다. 내가 묵었던 호텔은 꽤 좋은 Petasos 해변에 자리잡고 있어서 유럽의 부호들이 타고온 요트들이 즐비하게 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누드비치가 있다고 하던 수퍼파라다이스 비치는 너무 많은 젊은이(특히 독일인)들이 해변을 메우고 있어서 아무도 가까이 서로 보이는 거리에서 과감히 벗지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미코노스섬 바로 옆에 있는 델로스섬이 내게는 무엇보다 더 인상 깊었다. 키클라데스 제도 중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섬이지만 섬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 같아, BC 7 세기경 아폴론 신전 등을 비롯한 이곳 시설에 전 희랍인들이 모여 들어 델로스 동맹의 본무대로서 행사를 치루었던 곳이다. 여러 신들이 난무하던 무대가 폐허로 변해 지금은 사자상들만 즐비하게 남아 옛 영화를 지키고 있으며 3시 이후에는 모든 관광객을 퇴거 시킨다. 그리고 이곳 노천유적과 박물관에서도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확인하였는데 실제 Fontaine Minoe(이 섬은 프랑스 고고학자가 발굴하여서 다 불어로 써 놓았다.)라는 연못도 있었다.
아테네로 향하는 배를 타고 오다가 바로 들린 섬에 티노스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미코노스섬보다 호텔 등 물가가 덜 비싼 곳이라 이곳에 머물며 근처 미코노스, 델로스 등 몇 군데를 둘러 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 다음 시로스섬도 정박했는데 항구 뒤 산동네가 마치 바벨탐 같이 생겨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누가 장난 전화를 해서 큰 배 속의 가상폭탄을 수색하느라고 2시간이나 지연돼 아테네 피레우스 항에 밤 11시에나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도 올림픽 용으로 새로 한국에서 제작 설치했다는 최신 전차를 타고 밤거리를 달려가서 10일전 출발점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8월에 맞은 내 60갑자 생일을 자축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 집안에서도 어찌 차려야 하느니 마느니 신경 쓸 것이고, 남들도 공연히 오라가라 해야 할텐데 이렇게 홀로 즐기는 여행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 최대의 생일 치례가 되지 않겠는가?
혼자 여행이라 쓸쓸하려니 하겠지만 사실 자아분리[좀 어렵게 말하자면, 해리解離]를 시켜서 일정을 챙기는 내가 그냥 즐기기만 하는 나를 돌봐 준다고 생각하면 둘이 다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덤으로 베를린에도 와서 한 달간 연구하며 기행문 쓰며 보내는 요즘, 서울이 연일 무더운 36도였다니 여기는 습기가 없어 무더위가 없는데다 평균 27도 정도니 너무 대조가 되어 송구스럽지만, 혼자 피서 또한 잘 된 셈이다. (2004.8.22, 베를린에서, 이상억)
?후기: 왜 ‘사모님과 같이 다니지 않았느냐‘고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 사족을 붙이자면, 우선 내가 이제까지 약 50개국 이상 여행을 하면서 근 20개국은 마나님을 모시고 다닌 바 있어 이미 꽤 배려를 한 셈이다. 또 7월초 우리 외동딸을 시집 보낸 뒤라 집사람이라도 서울에 남아 돌봐 줄 일도 많았고, 또 집안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2 마리나 되는데 딸도 출가 후 부부 둘 다 떠나 집이 비면 밥 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몇 주일이나 개 호텔로 보내기에는 2 마리라 너무 비싸고, 집도 그렇게 오래 비우기는 어렵고. )
내가 에게해의 섬들을 여행하려고 작정한 것은 80년부터니까 4반세기만에 실행에 옮기게 된 셈이다. 80년 당시 호주 수도 캔베라의 호주국립대에서 호주 최초의 한국어 과정을 창설하면서, 아침마다 공관의 김 영사와 테니스도 치게 되었는데 그분의 전임지가 아테네여서 주말마다 섬들을 둘러 보니 아주 좋았다는 유혹적 정보를 들었던 것이다.
이 개인 여정에 앞서, <14차 국제한국언어학회>를 7월 12-16일간 터키 안탈랴 근처 앙카라대학 소유 해변 휴양호텔에서 개최하고, 17일 이후 내가 오래 전부터 면밀히 계획해 온 전체 일정대로, 터키의 파묵칼레, 그리스의 메테오라 등지를 같이 둘러 보았다. 그 동안 두 나라 사이를 건너며 약한 파도에도 멀미하느라 고생한 일부 회원 등 전체 일행과 작별하고, 23일 이후는 섬 사이를 각종 배로만 이동하였다.
일정은 서울에서 인터넷으로 배 시간을 찾아 짰는데, 배표 구입만은 현지에 와서 받을 수 있게 아테네 한국여행사에 부탁했다. 원래 학회 회원 중 정보를 알려 달라는 분들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여행 안내책자에 나오는 내용은 여기에 반복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른 내역만을 좀 상세히 밝혀 드리자면 아래와 같다. 각 숙박지에 호텔도 잡아 주도록 부탁했으나, 올림픽 직전이라는 이번 상황이 아니면, 부두에 내려 직접 해결하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23/JUL:From Piraeus to Heraklion: 49.50
26/JUL:From Heraklion to Santorini: 14.50
28/JUL:From Santorini to Paros: 11.40
29/JUL:From Paros to Naxos:9.60
30/JUL:From Naxos to Mykonos:8.50
01/AUG:From Mykonos to Piraeus: 19.00 TOTAL EURO 112.50
우선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로 찾아 나가는 데에만 3개 버스를 환승하고서야 10개의 승선장 중의 하나를 제대로 찾아 내었다. Minoan Line의 highspeed ferry는 거함답지 않게 쾌속으로 지중해의 거울 같은 물결 위를 달려 나갔다. 수면이 너무 잔잔해서 깨고 나가는 행위 자체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포세이돈 신의 아침 찻잔 속을 헤치고 나가다 무엄하다는 말을 듣지나 않을지... 그러나 바다는 시종 정말 너무 고요하였다.
수영장 등 여러 시설을 둘러 보며 배 속을 누비고 다녀도 동양인은 나 하나밖에 뜨이지 않았다. 정말 지중해의 이방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작열하는 태양볕 밑에 있자니 까뮈의 충동적 느낌을 공감할 수 있는것 같았다. 이렇게 멍해지고 있을 때 머리를 치며 떠오르는 한 마디:“아빠, 너무 태워 가지고 오면 집에 못 들어 와요!’’
첫 기착지인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항에 6시간만에 도착하였다. 이 섬은 그리스만이 아니라 옛 동로마제국과 베니스공국, 아랍, 오토만 터키, 독일, 영국 등이 교차로 점령해 온 동지중해의 한 가운데 있는 요충지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미노아 문명이 크노소스 궁전 등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이 궁전은 약 3,700년전에 이미 4 개 층으로 된 구조로 지어졌고 아마 1,200실 이상의 방들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돌로 된 뼈대가 잘 남아 있어 우리의 목조 2층이 고작이고 몇 백년 되지 않는 문화재와는 보존력이 현저히 달랐다.
크레타에서는 섬이 커서 3일을 배당해 둘러 보았는데, 레팀논과 하나, 이 2 도시를 보는데하루 또 말리아와 아기나-니콜라스쪽으로 둘러보는데 하루가 걸렸다. 말리아라는 유적지로 가는 연변에는 유도화(유엽도)가 흐드러지게 피어 큰 가로수로 자라 있었다. 우리가 방안에서 기르는 크기와는 영 달랐다. 그런데 이곳을 운행하는 버스가 벤츠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기사가 차장 외에도 친구까지 앞쪽에 태우고 가면서 떠들어대는데 정신이 없어 안전할까 걱정이 되었다. 동네 곳곳을 들리며 친구가 길에서 보이면 클랙션으로 인사를 하고 연신 담배까지 피워대니 참 가관이었다. 그래도 버스는 앞 유리가 2x1.5m의 통유리로 된 최신 벤츠제품이었다. 에게섬들의 버스가 미코노스섬만 빼고는 모두 이렇게 최신형으로 구비되어 있어 과연 관광 우선 국가다웠다.
이라클리온의 숙소였던 Astoria Hotel 옆 고고학 박물관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 사실이 하나 있다. 미노아 문명에서 생산 사용한 붉은 토기의 기하학적 문양 중에 과 똑같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에 기호로 주어지지 않은 것들은 뒤에 인쇄할 때 그려서 보이기로 한다.) 이미 4천년전에, 근래에야 우리가 여러 집단의 상징으로 쓰고 있는 대부분의 기호들이 다 발명되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불교의 만자 卍 형태가 이미 이 때에 보이며 역시 이 형태의 변형인 나치의 스와스티카(만자 획의 방향 Z가 아니라 반대로 S의 방향)도 같이 쓰이고 있었다. 불교나 나치 모두 채택연대가 한참 뒤니 원형이 크레타에서부터 전파된 것이라고 해석함이 옳겠다.
이밖에도 불교에서 윤회 사상의 표상으로 쓰는 팔등분된 원의 형태와 심지어 연화문도 이미 나타나 있고, 반전 평화주의 운동에 쓰이는 4등분된 원도 역시 이때 익히 쓰였던 것이다. 대개 BC 8-7 세기간의 적색 토기 유물들 중 기하학적 문양을 가진 것들은 한 부분에 위의 모양들을 장식으로 그려 넣었다. 더구나 유태인이 자기들 상징으로 쓰는 육각의 별(데이비드의 별)까지 BC 19-17 세기의 크레타 Phaistos지역 유물 중 clay sealing(도장을 파서 진흙에 눌러 그 굳는 것을 밀초처럼 봉한 것)에 나타나고 있었다. 토기 외에도 상자나 문을 봉할 때에 이미 다 쓰여지고 있었다.
물론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획의 조합 가능성은 빤한 것이어서 먼저 발명해 쓰는 사람이 이런 문양들을 다 만들어 쓰기 쉽지 않았겠느냐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온 청동기나 금세공 등 문명의 수준으로 보거나, 뒤에 본 다른 섬들의 박물관 소장품들로 보아 이 이상의 영예라도 당연히 돌려주어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미 생활에 상당한 여유가 있어서 그릇을 이와 같이 다양하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의 신라 토기만해도 몇 천년 뒤인데도 이런 수준이 아니었다.
각 곳의 박물관 직원들도 이 사실을 잘 몰라서 내가 설명을 해 주고, 다음부터 자랑스럽게 안내를 하라고 했더니 관련자료를 복사까지 해 주며 아주 좋아 하였다. 이밖에도 불교에서 윤회 사상의 표상으로 쓰는 팔등분된 원의 형태와 심지어 연화문도 이미 나타나 있고, 반전 평화주의 운동에 쓰이는 4등분된 원도 역시 이때 익히 쓰였던 것이다. 대개 BC 8-7 세기간의 적색 토기 유물들 중 기하학적 문양을 가진 것들은 한 부분에 위의 모양들을 장식으로 그려 넣었다. 더구나 유태인이 자기들 상징으로 쓰는 육각의 별(데이비드의 별)까지 BC 19-17 세기의 크레타 Phaistos지역 유물 중 clay sealing(도장을 파서 진흙에 눌러 그 굳는 것을 밀초처럼 봉한 것)에 나타나고 있었다. 토기 외에도 상자나 문을 봉할 때에 이미 다 쓰여지고 있었다. 이 크레타 봉인의 사용과 유태인의 구약시대 중 누가 먼저인지는 좀 따져 봐야겠지만... 이 주제에 몰입하다 보니 증거가 보일 때마다 찍느라고 이후 필름을 꽤나 쓰게 되었다.
크레타 이라클리온에는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기념관과 무덤도 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 종교상 파문까지도 감내하며 독일에서 살아야 했던 그이의 자취가 있다. 또 스페인 톨레도에서 엘그레코의 그림이 모여 있는 옛집 및 그의 걸작 '오르가스백작의 장례식'이 전시되어 있는 산토토메교회 등을 관광했었는데, 바로 그가 이곳 출신의 그리스 화가였다.
나의 꿈의 항해는 산토리니로 계속 순항하고 있었다. 달력에서 보던 섬, 그 파란 돔형 지붕에 흰벽 교회며 집들. 그리스의 국기 색을 그대로 칠해 놓은 올망졸망한 집들. 이런 것들을 연상하며 배가 섬에 접근할 무렵 나는 다시 놀라고 있었다. 아, 그 집들은 마치 눈이 온 것처럼 저 절벽위에 사풋히 흰 띠로 앉아 있고, 그 아래 바다에서 직벽으로 뻗어 오르며 펼쳐진 화산암석의 장관은 그랜드 캐년과 다름이 없었다. 콜로라도 강이 아니라 에게 바다가 밑에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백두산 천지가 바다에 빠져 있는 형상이다. 규슈 아소산의 육상 칼데라(Caldera)보다는 좀 작을 듯 어림 짐작되지만, 이곳은 마그마 분출 후 그 빈 공간으로 산체가 바다 속에 함몰된 뒤 다시 급경사의 내측벽이 침식된 특이한 반원형 분지다. 한국에서는 남해 거문도에 가서 아주 작지만 바다에 함몰된 칼데라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실제 산토리니섬은 화산 칼데라의 적갈색 단애가 둥그렇게 보이는 초대형 분화구 안쪽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접근법이 가장 장관이라 하겠다. 만약 정말 광적으로 배를 싫어 해서 비행기를 타고 가야겠다면 그런 촌사람을 위해 산토리니에도 아주 평평한 변두리 쪽에 비행장이 있기는 하다. 서양인들이 평생 모은 돈을 축내 타는 선망의 수만톤급 크루즈 선들이 거대한 절벽 밑에 작은 모형배처럼 떠있는 내해는 한 폭의 그림이다. (일정한 프로그램대로 진행되는 크루즈는 한국사람이 타기에는 댄스나 카지노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별로 맞지를 않는다.)
아마 산토리니(또는 시라)섬은 지구상에서 달리 보기 어려운 경치가 아닐 수 없다. 터키와 그리스의 관광지가 대개 지진과 전화로 허물어진 유적지가 많지만, 그리고 용케도 그런 모습을 그대로 둔 채 많은 관관객을 불러 모으지만, 산토리니만은 이 일대에서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메테오라와 함께 꼭 보아야 할 특이한 자연 경관 중의 하나다.
그런데 자연 경관 자체만이 아니라 내가 산토리니에서 또 놀란 것은, 그 남부지역 아크로티리에서 BC 6,000-100년전 유물이 60m의 화산재에 묻혀 있다가 1967년부터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에 미노아의 문양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풍설에는 이 섬이 플라톤이 말한 사라진 아틀란티스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지만, 하여튼 과거에 대단한 문명이 자생 또는 상륙해 있었던 곳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또 눈에 띄는 것은 호주에 많은 유칼립터스 나무가 기후 조건이 비슷한 여기에도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캘리포니아에 갔을 때 LA 근처에도 보이는 유칼립터스를 호주에서 옮겨온 것이라 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여기 원래 자생하는 듯한 이 많은 나무는 어떻게 된 것인가?
산토리니는 적어도 4개로 나눠진 섬을 보기 위해 하루 관광코스를 가담해야 교통편이 해결된다. 나는 대개 이런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내가 수집한 정보대로 시간 배정을 마음대로 하며 단독여행을 하는데, 이 때만은 할 수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해상 온천욕을 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페이스를 늦출 수 밖에 없었다. (역시 한 사람뿐인 동양인은 수영복을 안 가져 갔었다.) 그런데 이 단체여행은 집합 시간에 모두 칼 같이 맞춰 수십명이 잘도 움직였다. 물론 배를 타고 내릴 때 대개 같은 자리에 가 앉게 되는데, 한번은 Chevy Dealer가 공짜로 준 셔쓰를 입은 미국녀석이 내 자리를 차지했길래 비키라했더니 딴 사람도 좀 바꿔 앉았으니 안 되겠다는 것이다. 남의 자리를 함부로 차지하는 기막힌 일이 이라크 말고 여기서도 벌어지는구나 싶었다.
땡볕 밑에서 아직도 땅 속에서는 김이 나는 분화구 중앙섬 등을 둘러보고 나면, 하루 일정 끝에 이오라는 서쪽 단애 위의 도시에서 석양을 맞게 한다. 전날 피라라는 중심 도시에서 본 것과 또 다른 각도에서 그 끓던 붉은 해가 신들의 고향으로 끌려 들어가듯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도 카스트로라는 레스토랑에서 자리 값을 약간 포함한 음식을 시켜 먹었다.
산토리니는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작품이 나올 것 같다. 푸른색도 농도를 조금씩 달리 하는 하늘, 지붕, 바다, 그리고 하얀 집, 절벽의 적갈색 스펙트럼; 어느 때고 은퇴 후에 화판을 둘러 메고 와야지... 여기보다 좋은 풍경화, 산수화를 어디서 구하랴!
그렇지만 이 섬에서 겨울에는 춥고 바람이 심해, 노인만 남고 젊은이들은 본토인 반도로 이동한다고 한다. 여름 한 철은 돈 벌러 돈 쓰러 온 인간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다음 행선지는 조금 덜 알려진 파로스섬이다. 산토리니 이후부터 방문지는 모두 본래 키클라데스(희랍어로 사이클 ’바퀴’의 뜻) 제도라고 하여 바퀴 모양으로 모여있는 섬들이다. 사실은 이 섬과 옆의 낙소스섬을 하루씩 보는 대신 터키 쪽의 로도스섬을 가보려 했으나 너무 떨어져 있어서 직행선이 없어 운항일정에 넣지 못했다. 파로스에서는 섬 중앙 레프케스란 산동네로 가서 풍차도 보았는데 산골 동네 골목길도 모두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이곳에선 서양인들이 장기 휴양하는 한적한 나우사 옆 해변 지역의 호텔에서 잤는데 우연히 덤으로 뒷산에서 Michenean Acropolis를 보게 되었다. 여기가 북쪽의 펠로포네소스 반도에 중심을 둔 미케네 문명과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이 서로 교차되는 지역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낙소스섬은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서, 파로스를 제외한 다른 섬들처럼 돌산에 올리브 나무와 가시덤불만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여기서 숲이라고 해 봐야 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수종이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항구의 한편 언덕에 거대한 돌문이 서있어서 인상적이었는데 뒤에 나올 신성한 델로스섬을 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아피란토스라는 내륙까지 들어가 보았고 아기나-프로코피오스란 휴양지 해변 호텔에 묵었다. 독일 휴양객들이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많이 오는데, 떠날 때 주인이 아이들이 커서 또 자기 집을 찾도록 해 달라는 장면이 참으로 정겹게 보였다.
잠시 다른 얘기 좀 하자면, 이제까지 내 배낭은 아테네에서 일행과 작별하던 아침에 회원 여러분이 고맙게 남겨주신 깻잎 4, 정어리 3, 참치 3, 김치 2 깡통, 고추장 대/소, 김 6 봉지가 담겨 있었다. 큰 백을 전날 이미 여행사 지사장에게 맡겨 버린 뒤라, 그냥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떠났더니 꽤 무게가 나갔다. 산토리니섬에서 중국집을 한번 만나 흰밥(우리 백반 팩만은 못하다)을 사서 같이 먹어보았지만 좀처럼 줄지를 않았다. 그래서 개발한 방법인데 생선 깡통을 깻잎에 싸서 먹으면 괜찮은 궁합이다. 특히 정어리와 깻잎이 잘 맞아 함께 소비가 잘 되었다. 여행 중에는 입에 당기는 음식을 눈치껏 찾아 먹으며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징어젓까지 해 먹으며 다닐 수 있는 비법은 특별히 부탁하는 분께만 공개하겠다.)
마지막 2박 예정으로 미코노스섬으로 향하였다. 이 섬은 아테네에서 가깝고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서 그런지 젊은이로 비치가 북적대고 항구도시도 길이 좁아 복잡했다. 내가 묵었던 호텔은 꽤 좋은 Petasos 해변에 자리잡고 있어서 유럽의 부호들이 타고온 요트들이 즐비하게 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누드비치가 있다고 하던 수퍼파라다이스 비치는 너무 많은 젊은이(특히 독일인)들이 해변을 메우고 있어서 아무도 가까이 서로 보이는 거리에서 과감히 벗지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미코노스섬 바로 옆에 있는 델로스섬이 내게는 무엇보다 더 인상 깊었다. 키클라데스 제도 중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섬이지만 섬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 같아, BC 7 세기경 아폴론 신전 등을 비롯한 이곳 시설에 전 희랍인들이 모여 들어 델로스 동맹의 본무대로서 행사를 치루었던 곳이다. 여러 신들이 난무하던 무대가 폐허로 변해 지금은 사자상들만 즐비하게 남아 옛 영화를 지키고 있으며 3시 이후에는 모든 관광객을 퇴거 시킨다. 그리고 이곳 노천유적과 박물관에서도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확인하였는데 실제 Fontaine Minoe(이 섬은 프랑스 고고학자가 발굴하여서 다 불어로 써 놓았다.)라는 연못도 있었다.
아테네로 향하는 배를 타고 오다가 바로 들린 섬에 티노스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미코노스섬보다 호텔 등 물가가 덜 비싼 곳이라 이곳에 머물며 근처 미코노스, 델로스 등 몇 군데를 둘러 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 다음 시로스섬도 정박했는데 항구 뒤 산동네가 마치 바벨탐 같이 생겨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누가 장난 전화를 해서 큰 배 속의 가상폭탄을 수색하느라고 2시간이나 지연돼 아테네 피레우스 항에 밤 11시에나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도 올림픽 용으로 새로 한국에서 제작 설치했다는 최신 전차를 타고 밤거리를 달려가서 10일전 출발점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8월에 맞은 내 60갑자 생일을 자축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 집안에서도 어찌 차려야 하느니 마느니 신경 쓸 것이고, 남들도 공연히 오라가라 해야 할텐데 이렇게 홀로 즐기는 여행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 최대의 생일 치례가 되지 않겠는가?
혼자 여행이라 쓸쓸하려니 하겠지만 사실 자아분리[좀 어렵게 말하자면, 해리解離]를 시켜서 일정을 챙기는 내가 그냥 즐기기만 하는 나를 돌봐 준다고 생각하면 둘이 다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덤으로 베를린에도 와서 한 달간 연구하며 기행문 쓰며 보내는 요즘, 서울이 연일 무더운 36도였다니 여기는 습기가 없어 무더위가 없는데다 평균 27도 정도니 너무 대조가 되어 송구스럽지만, 혼자 피서 또한 잘 된 셈이다. (2004.8.22, 베를린에서, 이상억)
?후기: 왜 ‘사모님과 같이 다니지 않았느냐‘고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 사족을 붙이자면, 우선 내가 이제까지 약 50개국 이상 여행을 하면서 근 20개국은 마나님을 모시고 다닌 바 있어 이미 꽤 배려를 한 셈이다. 또 7월초 우리 외동딸을 시집 보낸 뒤라 집사람이라도 서울에 남아 돌봐 줄 일도 많았고, 또 집안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2 마리나 되는데 딸도 출가 후 부부 둘 다 떠나 집이 비면 밥 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몇 주일이나 개 호텔로 보내기에는 2 마리라 너무 비싸고, 집도 그렇게 오래 비우기는 어렵고. )
- Next 터키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와 석굴
- Prev '하늘'과 '아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