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견문록

ANTHOLOGY

곡구(曲球)를 하는 이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3-25
조회
34
96년 9월이후 호주에서는 극우적 백호주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 국내외에 백해무익한 에너지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두 번 결혼에 실패하고 튀김집을 직영하는 폴린 핸슨이란 초선 여성 연방의원이 의회 처녀 연설에서 아시아인의 이민유입을 비난하며 적잖은 호주인의 가슴 속에 깔려 있는 촌스런 생각을 들쳐보이고 있다. 튀김하던 솜씨로 문제를 끝없이 뻥튀기고 있어도 원래 아시아에 대해 친근감이 없는 하워드 수상은 방관을 해보며 표밭이나 다지려 했다. 비전있는 정치지도자라면 앙칼진 목소리로 앞뒤없이 내뱉는 극단적 발언을 언론자유라고 두둔할 수는 없었다. 설사 적잖은 호주인이 아시아인을 싫어하고 핸슨이 그 대변을 거침없이 하는 현상이라 해도 큰 방향을 잘 잡아가야만 하는 정치경륜가는 때맞춰 키를 돌려야 했다.

핸슨이란 여자는 남자들과 조화를 잘못해 왔으므로 비백인사회에 대한 융화인들 잘 할 리가 없는 것이겠다. 그 어머니의 그 딸이라고, 시대착오적 황화론(黃禍論)을 뇌까리는 촌스런 어머니를 보면 그 성장배경이 짐작된다. 여기서 16년전 시드니에 왔다 본다이비치에서 당한 일을 소개해야 겠다. 뚝에 앉아 있는 내 등에 대고 '중국놈 돌아가라'고 외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7-8세 된 소년이 부모품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아 저아이가 무얼 알겠냐? 부모가 그렇게 가르쳐놨겠지'라고 생각했다. 백호주의를 포기한 1973년 이후 한 세대가 바뀌었어도 잘못된 부모 노릇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다수를 이루는 백인주류사회의 여론이 국제적 감각없이 국지적 촌놈처럼 흘러도, 세계여행이라도 해 보고 외국인 접촉이 많았던 일류정치인이라면 풋내기 시골의원이나 형편없는 부모들처럼 언행을 해서는 안된다. 치세가(治世家)는 우매한 대중을 일깨워 바른 길로 이끄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면 그는 임기연장에 연연하는 일개정객일 뿐이다. 양측 당사자들 중 특히 지식인들은 서로 불필요한 마찰을 없애는 슬기를 보여야 한다.

호주 기자들이 이임하는 권병현 주호한국대사에게 덫을 놓아 한국이 핸슨발언의 표적이 되게끔하려 했겠지만, 미리 외교적 교감에 의해 그런 마찰을 피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 기자도 좋은 지식인은 못된다. 한번 전주중국 호주대사가 권대사 및 필자 등을 초청한 만찬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던 끝에 호주가 어떻게 하면 아시아와 깊은 이해심을 가진 관계를 구축하겠는가를 질의했다. 답은 간단하다. 우선 애매한 수상의 태도로 보여진 경우 같이 불신의 원인 제공을 해서는 안된다. 그 뒤에야 여러 방안의 노력이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측도 호주, 특히 그 우매한 대중들이 아시아 및 그 이민자들에 깊은 이해심을 가지도록 노력을 더 해야 한다. 우선 실업율이나 범죄율을 거들먹거리지 않도록 근면하고 준법적인 생활을 보여야 한다.

나는 시드니의 한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첫날부터 옆집 할머니가 유색 외국인에게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는 여자인 것을 알고 방책을 하나 세웠다. 그 할머니가 하얀 유니폼을 입고 런볼링(lawn bowling 곡구 曲球)을 하러 나가는 날, 나도 그것을 좀 해 보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의 생활과 문화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편견을 버리고 이해심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내 방책은 즉각 효과가 있었고 그 이후 이 할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북부중상류층이 살고 있는 우리 곡구 클럽을 통해 많은 노인들과 사귀게 됐다. 대부분 은퇴기의 노일들이라 무척 보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또 세계 여기저기 이야기를 하면 그저 관광차 어디어디 정도 가 본 것이 고작이다. 노란 피부의 필자가 그래도 자기들 누구보다 못지 않은 학력과 경험을 해 온 사실을 알고는 어조를 달리한다.

한번은 하버드 대학을 관광하고 왔다는 노인이 있어 내가 2년간 리서치펠로우(Research Fellow, 연구초빙교수)로 있었다 했더니 그 뒤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그런 대화들 속에서 나는 이 사람들은 이민자에 대한 편견이 꽤 많다는 것을 확인했고 왕당파에 자유당 지지자가 많다는 것도 재인식했다. 그러나 나 하나를 통해서라도 아시아인, 특히 한국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된 것은 사실이다.

나는 농담처럼 황화론이 아니라 황금론(黃金論)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김씨들이 많아 모두 금을 들고 호주에 들어오니, 황인종이 화근이 되어 내전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핸슨의 억지는 기우라고 말이다.

특히 한국은 선별된 고급이민이 많이 들어와 외국인 혐오증을 일반화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해 준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곡구장엘 간다. 물론 경기자체도 즐기지만, 중간휴식시간과 끝낸 뒤 한잔하며 노인들에게라도 황금론을 설파하기 위해서, 하얗게 백의민족처럼 유니폼을 차려 입고 흰 모자를 쓰고 흰 구두까지 신고, 공을 둥그렇게 돌려 보내듯이 간접적인 말을 통해서라도 고집센 노인들 마음 속에 이해심이 생기기를 바라면서.

어차피 그들 마음 속 저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편견을 이번엔 핸슨이 들춰낸 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백인만이 잘 살아보겠다는 앙버팀이 2000년대에는 더 이상 안 통한다는 현실을 호주의 인종편견적 보수주의자들도 절감하게 되기를 빈다. [호주동아, 199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