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문제 산책
ANTHOLOGY
한국어의 특질을 통해 본 '한국의 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4-11
조회
102
가. 모국어 보존과 민족성 유지의 병행성
주시경 선생이 "언어와 민족과 국가는 겉으로는 셋이나 속으로는 하나다"라는 말을 남겼듯이, 민족의 특성을 상실한 지구 가족들이 겪는 고난을 우리는 현재도 잘 보고 있다. 지구상의 대소 분쟁이 일어나는 근저에는 민족의 특성을 유지하려는 욕구와 언어의 바탕이 다름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결국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의 대립이 와해되어 가는 현 세대에게 남을 끈질긴 바탕은, 민족성과 모국어의 유지보존이라는 토대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민족의 특성, 그 '얼'을 유지시키는 방법으로는 모국어의 보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만주족이 청나라의 멸망과 함께 거의 소멸돼 버리다시피한 사실은 멀리 두고서라도, 현재 캐나다의 영·불 지역 분리운동이나, 소연방이 각 민족 자치공화국별로 독립을 선포하며 분열의 길로 치닫고 있는 상황도 결국 언어를 달리하는 민족분파간의 갈등인 것이다. 미국은 소위 '용광로'정책으로 언어의 단일화를 기해 왔으나, 그 정책이 장점만 갖는 것이 아니라, 적지 않은 단점도 내포한 것임을 깨닫고 있다.
가령 1987년부터 89년까지 3년간 서울대에서 본인의 주관으로 UCLA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내에서 한국어와 문화의 현장교육'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이 깔려있다.
"미국의 외국어에 대한 정책은, 최근의 대통령 산하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귀중한 외국어 잠재 보유 능력을 '수치스러운'(scandalous) 수준까지 상실시켜 버리게 하였다. 따라서 UCLA학생 중에 스페인 계통 학생들에게 이미 실시하고 있는 계획에 이어, 한국 교포 학생들 중심의 2차 사업으로, 또 평화봉사단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던 미국인 등까지 모든 잠재적 한국어 능력 보유자에 대한 보존 교육을 실시하려 한다. 이 교육은 피동적으로 잠자고 있던 언어 능력을 재가동시켜 주는 기회가 될 것이며, 사회·문화적 배경까지 잘 이해시키기 위해 한국 현지에서 집중적으로 실시하려 한다."
위의 계획에 따라 UCLA 동 아시아 어문화과에서 한국어를 조금 배운 학생부터 원래 꽤 높은 수준까지 하던 소위 1.5세 학생까지 매년 약 20명씩을 선발, 3년간 총 60명을 봄마다 10주간씩 교육한 바 있다.
현재 이 후속 사업은 좀 더 첨단적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양교간의 위성통신 교육망에 의해 실시되고 있다. 1990년 4월 개통된 SNU-UCLA Interactive communication Link는 미국 뉴욕의 Optel사 제품인 특수 모뎀을 이용, 원격 화상 전송 및 음성 전달을 동시에 하되 일반 전화 2회선만 씀으로 그 비용이 꽤 저렴하다. 이같은 상설 통신 교육(및 회의)망을 설치해 놓게 되어 연중 어느 때나 접촉할 수 있고, 또 수혜인원이나 분야에 제한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 보존(conservation) 사업은 미국 자체의 국익을 위해서도 궁극적으로 좋을 것이다. 가령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무렵 미국 정부 내에 한국 문제 전문가가 직접 관여하여 한반도 문제를 다루었다면 38선과 같은 분단의 비극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에 뒤따르는 한국 전쟁으로 미국이 많은 재력과 인명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한민족의 단일성을 잘 알던 전문가가 있었다면, 전범국인 일본의 혹가이도와 동북 혼슈지방을 떼어 주었을지언정, 죄없는 한민족을 갈라 놓았으랴!
2차대전이 끝난 뒤만 해도 2개 언어를 말하는 것은 저급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 지금은 미국인의 가치관도 변해서 외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status symbol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다.
요컨대 모국어 유지 보존은 민족성의 상실을 막고 뿌리를 지키는 일일 뿐더러, 더 나아가 그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나. 국수주의적 모국어 찬양은 곤란
모국어의 보존 필요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흔히 지나치게 국수주의적, 자기 중심적 경향으로 쏠린 발언을 하게 되는 사람들을 본다. 가령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데 심취하다 보면, 어느새 문자와 언어의 구별을 못하고 '한글'이란 말로 한국어, 즉 언어를 대신하게 하는 용법을 서슴치 않는 사이비 학자들이 있다. 한글은 과학적 문자로서 이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문자를 지칭하는 '한글'이란 이름을 언어 자체를 가리키는 데까지 사용해서는 혼동이 심하게 된다.
항간에 '한글학자'라는 명칭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뜻이 '한글이란 문자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괜찮아도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곤란하다. 도대체 문자와 언어의 차이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학자인 척하고 행세를 하는 현실에서 '한글학자=국어학자'라는 틀린 용법까지 나왔겠으나, 이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고 끝내 정화가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이렇게 잘못 쓰는 용법 때문에 새로 생겨나기까지 한 말에, 이 글 제목으로 주어진 '얼'이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현재 '정신, 넋, 혼'이란 뜻으로 쓰여지고 있으나, 이조 때는 이런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어리다'(迷)라는 단어로는 나타났었고, '얼빠지다'같은 말 속에 '어리-빠지다'(迷惑), 즉 '어리석어 빠지다'의 뜻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렇게 분석하는 근거는 양주동에 따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얼빠지다'를 '정신빠지다'로 근래에 잘못 분석하여 '얼=정신'으로 쓰기 시작한 첫 예는 정인보의 '조선민족 5천년의 얼'이란 글부터였을 것이라 한다.
언어의 발달과정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분석에 따른 오용의 사례는 흔히 있을 수 있다. 이 경우는 그로 말미암아 '정신'이란 뜻의 고유어를 하나 더 창조하게 된 셈이고, 현재 그 어원에 대해 거부감없이 잘 쓰이고 있는 말이니, 그냥 '얼=정신'으로 받아들여 두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만약 이런 말까지 어원을 따져 현대어에서 축출한다면, 또 일본식 한자어라고 하여 '안내'는 몰아내고 대신 '인도'만 쓰자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과연 우리말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더구나 '안내'와 '인도'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쓰이게까지 된 단어이니 그냥 다 각각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국어란 모든 사람이 다 잘 알고 일가견을 가진 듯이 행동하기 쉬운 것이어서 자칫하면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기 쉽고 또는 엄정주의·순수주의에 빠지기도 쉽다. 그러나 이런 지나침으로 일어나는 잘못을 우리는 가급적 피하는 양식(良識)을 가져야 겠다.
다. 이민 세대 차에 따른 적절한 학습 수준 설정
모국어를 통해 주체성(identity)을 추구하려는 이유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요인을 든다. 1) 주체성의 위기를 맞아 그 해소 방법으로 자기 모국의 국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2) 유태인 등과 같이 그 민족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려는 강한 습관에 따른다. 3) 국제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자기의 민족적 배경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4) 부모의 세대와 대화를 용이하게 하여 동질성을 회복하려 한다. 5) 취업상의 실제적 필요에 의해 직업의 도구로서 모국어를 배우려 한다.
그런데 사실 ‘한국어를 왜 가르쳐야 하느냐’는 것이 현안은 아니고, 이미 그 전제를 인정한 대상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를 살펴 보자는 것이 당면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한 첫 과제로 우선 대상자들을 어떻게 분류하여 각각 그 달성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문제다.
미국으로 이민 올 때의 시점을 참작하여 7-15세 사이에 와서 한국어와 관습도 어느 정도 유지하며 미국의 새 생활에 적응하여 온, 1.5세대는 거의 이중언어를 형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목표로 할 수 있다. 이들은 상급반까지 진급하여 이미 알고 있는 한국어나 문화의 습득 부분을 더 확충하여 한국어를 활용하는 직업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일찍 미국에 왔거나 어린 나이부터 미국 교육만 받고 민족 교육을 접할 기회가 없어 한국적인 것을 잊고 거의 미국화된 생활을 해 온, 2세들은 우선 초급반부터 시작하여 문자 터득을 한 뒤 그 기초와 함께 민족적 주체성도 찾아 나가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마 2세들은 끝내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주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극복하는 데에는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문제는 결국 한국어의 특질이 무엇인가를 대략 말해 보아야 어떤 방안이 나올 것이다. 다만 그 전 단계로서 이민 세대 차에 따른 학습 목표와 수준을 각기 달리 적절히 잡아야겠다는 것이다.
라. 한국어의 특질과 학습 수준의 설정
초급반에서는 어떤 내용을 가르치며, 중급·상급반으로 가면서 어떤 수준까지 도입하여야 하는가에는 단일한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 교육 분야같이 학습 내용이 잘 정비되어 있는 언어의 경우를 많이 참조하면서, 국어에만 특수한 사항들은 그 나름대로 적당한 단계에서 학습이 될 수 있도록 짜 넣어야 하겠다.
그런데 영어에 복수의 개념이 있다 하여 우리 말을 가르치면서 '-들'을 너무 부각시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국어의 특질로서, 구태여 수(數)표시를 명확히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어떤 번역가가 한국 역사책에 "러시아 배가 쳐들어 왔다"는 구절을 놓고, 이 때 실제 몇 척의 배가 나타났던 것인지 사실을 확인하느라고 고생했다는 말을 했다. '배(들)', '함대', '함선(들)'등의 표현에 수 개념이 꼭 명시되지 않는 것이 우리 습관인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는 생길지 몰라도 결코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는 식의 평가는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말에서 수 표시를 소홀히 하는 것이 단점이라면, 영어에서 화자와 주어 등의 신분을 쉽게 짐작케 하는 존비·겸양법의 경어체가 발달되지 않은 것도 단점일 수 있다. 원래 언어 간에 우열을 따질 수는 없는 법이다. 국어에 많은 과학 용어가 있다고 에스키모어보다 우수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눈'에 관한 많은 단어(적어도; 내리는 눈, 내려서 쌓인 눈, 굳어서 눈집짓기 좋은 눈 등)에 대한 '눈'이란 한 단어('진눈깨비'도 결국 '눈'이란 단어가 핵심이다) 밖에 없는 한국어가 미개한 언어라고 반박할 것이다.
국어에 경어법이 있으므로 해서 주어를 생략해도 원래 어떤 주어가 있었던가를 종결어미에 남아 있는 경어체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계를 ["X가 Y에게 Z를 주(시)었(습니)다"라고 A가 B에게 말하다]라는 예문을 통해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주격, 여격(평칭/존칭), 목적격, 동사(평칭/존칭)어간, 과거, (존칭)어미, 화자, 청자
위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역시 연결어미에서도 적잖은 정보량을 담고 있어서, 접속사가 없이도 문장 전후 관계를 알 수 있게 하고, 생략된 부분을 복원시켜 이해하는 과정을 돕게도 한다. 관계대명사가 없어도 국어는 그를 대신하는 기능을 관형어미에 담긴 일부 정보를 맡게 한다.
국어의 특질 가운데 조사의 발달도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이 표시로서 자유로운 어순이 가능하게 된다. 외국인들의 한국어 학습 과정이나 표현 습관에서 조사 생략을 많이 하는데, 이런 경향은 자유어순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조사를 함부로 생략하지 않고 어순상 문제가 없을 때만 수의적으로 생략한다.
특질의 또 한 면으로 의성·의태어, 색채어 등의 뉘앙스 표시가 다채롭고 미묘하게 발달되어 있다. 맛, 냄새에 관한 말도 그 복잡성이 꽤 엿보인다. 여기서는 색채어만 예로 들면, '희다, 하얗다, 허옇다, 희뿌였다, 희끄무레하다, 희끄스름하다, 희끗희끗, 희끔하다, 해끔하다, 해끗해끗, 희맑다, 희멀겋다, 희멀쑥하다, 희묽다, 허여멀겋다, 희불그레하다, 희읍스름하다' 등이 있다. 과연 어떤 언어가 이만큼 다양한 뉘앙스를 나타내고 있을까 감탄할 정도다.
아마도 여기서 국어의 특질로 열거한 몇 가지 예들은 한국어 학습과정에서도 꽤 상급으로 가야 배우게 될 요목이 아닌가 싶다. 경어법이나 색채어의 뉘앙스가 그렇고, 조사에서도 '-는'과 '-가'의 차이 같은 것은 어려운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사항은 초급부터 조금 노출시킬 수 있겠으나, 이런 내용들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좀 더 한국어를 배운 뒤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어의 특질로 꼽을 만한 내용은 흔히 학습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수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한국어는 그 특질을 다 배우려면 좀 오래 걸리고 어려운 언어일 것이란 평판을 얻기 쉽다. 사실 한국어를 배우기는 쉽지 않고, 미국 워싱턴의 Foreign Service Institute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분류하고 있다. 즉 가장 머리를 많이 써야 배울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한국어를 배운다는 일은 지능개발을 위해서 가장 좋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주시경 선생이 "언어와 민족과 국가는 겉으로는 셋이나 속으로는 하나다"라는 말을 남겼듯이, 민족의 특성을 상실한 지구 가족들이 겪는 고난을 우리는 현재도 잘 보고 있다. 지구상의 대소 분쟁이 일어나는 근저에는 민족의 특성을 유지하려는 욕구와 언어의 바탕이 다름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 결국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의 대립이 와해되어 가는 현 세대에게 남을 끈질긴 바탕은, 민족성과 모국어의 유지보존이라는 토대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민족의 특성, 그 '얼'을 유지시키는 방법으로는 모국어의 보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만주족이 청나라의 멸망과 함께 거의 소멸돼 버리다시피한 사실은 멀리 두고서라도, 현재 캐나다의 영·불 지역 분리운동이나, 소연방이 각 민족 자치공화국별로 독립을 선포하며 분열의 길로 치닫고 있는 상황도 결국 언어를 달리하는 민족분파간의 갈등인 것이다. 미국은 소위 '용광로'정책으로 언어의 단일화를 기해 왔으나, 그 정책이 장점만 갖는 것이 아니라, 적지 않은 단점도 내포한 것임을 깨닫고 있다.
가령 1987년부터 89년까지 3년간 서울대에서 본인의 주관으로 UCLA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내에서 한국어와 문화의 현장교육'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이 깔려있다.
"미국의 외국어에 대한 정책은, 최근의 대통령 산하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귀중한 외국어 잠재 보유 능력을 '수치스러운'(scandalous) 수준까지 상실시켜 버리게 하였다. 따라서 UCLA학생 중에 스페인 계통 학생들에게 이미 실시하고 있는 계획에 이어, 한국 교포 학생들 중심의 2차 사업으로, 또 평화봉사단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던 미국인 등까지 모든 잠재적 한국어 능력 보유자에 대한 보존 교육을 실시하려 한다. 이 교육은 피동적으로 잠자고 있던 언어 능력을 재가동시켜 주는 기회가 될 것이며, 사회·문화적 배경까지 잘 이해시키기 위해 한국 현지에서 집중적으로 실시하려 한다."
위의 계획에 따라 UCLA 동 아시아 어문화과에서 한국어를 조금 배운 학생부터 원래 꽤 높은 수준까지 하던 소위 1.5세 학생까지 매년 약 20명씩을 선발, 3년간 총 60명을 봄마다 10주간씩 교육한 바 있다.
현재 이 후속 사업은 좀 더 첨단적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양교간의 위성통신 교육망에 의해 실시되고 있다. 1990년 4월 개통된 SNU-UCLA Interactive communication Link는 미국 뉴욕의 Optel사 제품인 특수 모뎀을 이용, 원격 화상 전송 및 음성 전달을 동시에 하되 일반 전화 2회선만 씀으로 그 비용이 꽤 저렴하다. 이같은 상설 통신 교육(및 회의)망을 설치해 놓게 되어 연중 어느 때나 접촉할 수 있고, 또 수혜인원이나 분야에 제한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 보존(conservation) 사업은 미국 자체의 국익을 위해서도 궁극적으로 좋을 것이다. 가령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무렵 미국 정부 내에 한국 문제 전문가가 직접 관여하여 한반도 문제를 다루었다면 38선과 같은 분단의 비극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에 뒤따르는 한국 전쟁으로 미국이 많은 재력과 인명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한민족의 단일성을 잘 알던 전문가가 있었다면, 전범국인 일본의 혹가이도와 동북 혼슈지방을 떼어 주었을지언정, 죄없는 한민족을 갈라 놓았으랴!
2차대전이 끝난 뒤만 해도 2개 언어를 말하는 것은 저급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 지금은 미국인의 가치관도 변해서 외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status symbol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다.
요컨대 모국어 유지 보존은 민족성의 상실을 막고 뿌리를 지키는 일일 뿐더러, 더 나아가 그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나. 국수주의적 모국어 찬양은 곤란
모국어의 보존 필요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흔히 지나치게 국수주의적, 자기 중심적 경향으로 쏠린 발언을 하게 되는 사람들을 본다. 가령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데 심취하다 보면, 어느새 문자와 언어의 구별을 못하고 '한글'이란 말로 한국어, 즉 언어를 대신하게 하는 용법을 서슴치 않는 사이비 학자들이 있다. 한글은 과학적 문자로서 이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문자를 지칭하는 '한글'이란 이름을 언어 자체를 가리키는 데까지 사용해서는 혼동이 심하게 된다.
항간에 '한글학자'라는 명칭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뜻이 '한글이란 문자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괜찮아도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곤란하다. 도대체 문자와 언어의 차이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학자인 척하고 행세를 하는 현실에서 '한글학자=국어학자'라는 틀린 용법까지 나왔겠으나, 이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고 끝내 정화가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이렇게 잘못 쓰는 용법 때문에 새로 생겨나기까지 한 말에, 이 글 제목으로 주어진 '얼'이란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현재 '정신, 넋, 혼'이란 뜻으로 쓰여지고 있으나, 이조 때는 이런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어리다'(迷)라는 단어로는 나타났었고, '얼빠지다'같은 말 속에 '어리-빠지다'(迷惑), 즉 '어리석어 빠지다'의 뜻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렇게 분석하는 근거는 양주동에 따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얼빠지다'를 '정신빠지다'로 근래에 잘못 분석하여 '얼=정신'으로 쓰기 시작한 첫 예는 정인보의 '조선민족 5천년의 얼'이란 글부터였을 것이라 한다.
언어의 발달과정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분석에 따른 오용의 사례는 흔히 있을 수 있다. 이 경우는 그로 말미암아 '정신'이란 뜻의 고유어를 하나 더 창조하게 된 셈이고, 현재 그 어원에 대해 거부감없이 잘 쓰이고 있는 말이니, 그냥 '얼=정신'으로 받아들여 두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만약 이런 말까지 어원을 따져 현대어에서 축출한다면, 또 일본식 한자어라고 하여 '안내'는 몰아내고 대신 '인도'만 쓰자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과연 우리말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더구나 '안내'와 '인도'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쓰이게까지 된 단어이니 그냥 다 각각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국어란 모든 사람이 다 잘 알고 일가견을 가진 듯이 행동하기 쉬운 것이어서 자칫하면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기 쉽고 또는 엄정주의·순수주의에 빠지기도 쉽다. 그러나 이런 지나침으로 일어나는 잘못을 우리는 가급적 피하는 양식(良識)을 가져야 겠다.
다. 이민 세대 차에 따른 적절한 학습 수준 설정
모국어를 통해 주체성(identity)을 추구하려는 이유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요인을 든다. 1) 주체성의 위기를 맞아 그 해소 방법으로 자기 모국의 국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2) 유태인 등과 같이 그 민족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려는 강한 습관에 따른다. 3) 국제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자기의 민족적 배경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4) 부모의 세대와 대화를 용이하게 하여 동질성을 회복하려 한다. 5) 취업상의 실제적 필요에 의해 직업의 도구로서 모국어를 배우려 한다.
그런데 사실 ‘한국어를 왜 가르쳐야 하느냐’는 것이 현안은 아니고, 이미 그 전제를 인정한 대상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를 살펴 보자는 것이 당면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한 첫 과제로 우선 대상자들을 어떻게 분류하여 각각 그 달성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문제다.
미국으로 이민 올 때의 시점을 참작하여 7-15세 사이에 와서 한국어와 관습도 어느 정도 유지하며 미국의 새 생활에 적응하여 온, 1.5세대는 거의 이중언어를 형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목표로 할 수 있다. 이들은 상급반까지 진급하여 이미 알고 있는 한국어나 문화의 습득 부분을 더 확충하여 한국어를 활용하는 직업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일찍 미국에 왔거나 어린 나이부터 미국 교육만 받고 민족 교육을 접할 기회가 없어 한국적인 것을 잊고 거의 미국화된 생활을 해 온, 2세들은 우선 초급반부터 시작하여 문자 터득을 한 뒤 그 기초와 함께 민족적 주체성도 찾아 나가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마 2세들은 끝내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주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극복하는 데에는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문제는 결국 한국어의 특질이 무엇인가를 대략 말해 보아야 어떤 방안이 나올 것이다. 다만 그 전 단계로서 이민 세대 차에 따른 학습 목표와 수준을 각기 달리 적절히 잡아야겠다는 것이다.
라. 한국어의 특질과 학습 수준의 설정
초급반에서는 어떤 내용을 가르치며, 중급·상급반으로 가면서 어떤 수준까지 도입하여야 하는가에는 단일한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 교육 분야같이 학습 내용이 잘 정비되어 있는 언어의 경우를 많이 참조하면서, 국어에만 특수한 사항들은 그 나름대로 적당한 단계에서 학습이 될 수 있도록 짜 넣어야 하겠다.
그런데 영어에 복수의 개념이 있다 하여 우리 말을 가르치면서 '-들'을 너무 부각시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국어의 특질로서, 구태여 수(數)표시를 명확히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어떤 번역가가 한국 역사책에 "러시아 배가 쳐들어 왔다"는 구절을 놓고, 이 때 실제 몇 척의 배가 나타났던 것인지 사실을 확인하느라고 고생했다는 말을 했다. '배(들)', '함대', '함선(들)'등의 표현에 수 개념이 꼭 명시되지 않는 것이 우리 습관인데, 그것이 과학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는 생길지 몰라도 결코 우리 민족이 열등하다는 식의 평가는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말에서 수 표시를 소홀히 하는 것이 단점이라면, 영어에서 화자와 주어 등의 신분을 쉽게 짐작케 하는 존비·겸양법의 경어체가 발달되지 않은 것도 단점일 수 있다. 원래 언어 간에 우열을 따질 수는 없는 법이다. 국어에 많은 과학 용어가 있다고 에스키모어보다 우수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눈'에 관한 많은 단어(적어도; 내리는 눈, 내려서 쌓인 눈, 굳어서 눈집짓기 좋은 눈 등)에 대한 '눈'이란 한 단어('진눈깨비'도 결국 '눈'이란 단어가 핵심이다) 밖에 없는 한국어가 미개한 언어라고 반박할 것이다.
국어에 경어법이 있으므로 해서 주어를 생략해도 원래 어떤 주어가 있었던가를 종결어미에 남아 있는 경어체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계를 ["X가 Y에게 Z를 주(시)었(습니)다"라고 A가 B에게 말하다]라는 예문을 통해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주격, 여격(평칭/존칭), 목적격, 동사(평칭/존칭)어간, 과거, (존칭)어미, 화자, 청자
위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역시 연결어미에서도 적잖은 정보량을 담고 있어서, 접속사가 없이도 문장 전후 관계를 알 수 있게 하고, 생략된 부분을 복원시켜 이해하는 과정을 돕게도 한다. 관계대명사가 없어도 국어는 그를 대신하는 기능을 관형어미에 담긴 일부 정보를 맡게 한다.
국어의 특질 가운데 조사의 발달도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이 표시로서 자유로운 어순이 가능하게 된다. 외국인들의 한국어 학습 과정이나 표현 습관에서 조사 생략을 많이 하는데, 이런 경향은 자유어순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조사를 함부로 생략하지 않고 어순상 문제가 없을 때만 수의적으로 생략한다.
특질의 또 한 면으로 의성·의태어, 색채어 등의 뉘앙스 표시가 다채롭고 미묘하게 발달되어 있다. 맛, 냄새에 관한 말도 그 복잡성이 꽤 엿보인다. 여기서는 색채어만 예로 들면, '희다, 하얗다, 허옇다, 희뿌였다, 희끄무레하다, 희끄스름하다, 희끗희끗, 희끔하다, 해끔하다, 해끗해끗, 희맑다, 희멀겋다, 희멀쑥하다, 희묽다, 허여멀겋다, 희불그레하다, 희읍스름하다' 등이 있다. 과연 어떤 언어가 이만큼 다양한 뉘앙스를 나타내고 있을까 감탄할 정도다.
아마도 여기서 국어의 특질로 열거한 몇 가지 예들은 한국어 학습과정에서도 꽤 상급으로 가야 배우게 될 요목이 아닌가 싶다. 경어법이나 색채어의 뉘앙스가 그렇고, 조사에서도 '-는'과 '-가'의 차이 같은 것은 어려운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기초적인 사항은 초급부터 조금 노출시킬 수 있겠으나, 이런 내용들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좀 더 한국어를 배운 뒤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어의 특질로 꼽을 만한 내용은 흔히 학습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수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한국어는 그 특질을 다 배우려면 좀 오래 걸리고 어려운 언어일 것이란 평판을 얻기 쉽다. 사실 한국어를 배우기는 쉽지 않고, 미국 워싱턴의 Foreign Service Institute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분류하고 있다. 즉 가장 머리를 많이 써야 배울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한국어를 배운다는 일은 지능개발을 위해서 가장 좋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