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문제 산책

ANTHOLOGY

'정보, 민주, 의리, 명분'의 의미 다변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4-11
조회
46
신에 대한 신앙은 검증을 한다는 것이 벌써 불신앙의 시작이 되겠지만, 보통 인간들끼리 하는 신뢰는 증거를 보이고 계속된 실적을 쌓아야 굳어지게 마련이다. 대망의 2000년이라던 지난해가 한국주가 하락사상 대망(大亡)으로 끝나고, 대개 소망(小望)의 2001년만 바라는 지경이 된 까닭은 신뢰가 쌓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북 지원사업에 1000억 이상을 쓰고서도 노벨 평화상금 10억 원만을 벌어 왔으니 경제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잖냐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를 진정 두렵게 하는 것은 혹시 북한이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실이다. 무력(無力) 통일로 전략을 선회한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오로지 믿는 물질적 힘까지 야금야금 빼어가 버리면 정신무장도 허약한 요즘 강성(强性)대국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가 도처에 만연한 원인 중 하나는 전 대통령들이 솔선 수범(首犯)으로 부정 축재한 검은 돈을 내놓지도 않으면서 현 대통령과 만찬이나 하는 데 있다. 이런 장면은 아무리 지역감정 해소 또는 지역민심 확보의 궁여지책이라 해도 어린애게라도 도덕 교육을 하기에 곤란한 사례다. 독일의 통일 공로자 콜 수상이 겪는 도덕성 심판을 보면 우리는 너무 해이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위의 글에서 한자를 보인 단어들은 소위 동음이의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발음은 우연히 같지만 한자 즉 뜻이 다른 짝들(待望, 所望, 武力, 强盛, 垂範과 대비)이다. 영어로 pun이라 부르는 말장난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발음은 같으나 쓰이는 뜻의 내용이 더 넓어지거나 변화한 경우가 있다. 전 대통령들이 보안 정보 분야를 맡다가 집권할 무렵 '정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공포와 불신으로 억압하던 개념을 주로 던져 주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비군부 출신 대통령 시대 이후 눈에 띄게 '정보'라는 단어의 뜻은 긍정적인 쪽으로 바뀌었다. 요즘 웬만한 학문치고 정보라는 용어를 그럴싸하게 섞어 쓰지 않는 분야가 없다. 이 단어만큼 화려한 변신을 하여 총애를 받고 있는 예도 드물다. 영어로 구별하면 '첩보'라는 의미의 intelligence에서 '지식'이란 의미도 있는 information으로 더 자주 쓰이게 된 것이다. 이 두 영어 단어가 다 '정보'로 번역될 수 있는데, 국어의 '정보'에 여러가지 뜻의 다의(多義 polysemy)가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그 어의(語義)를 원래 주로 쓰이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기울게 바꾼 것이다.

‘민주'니 ‘민주주의'니 하는 단어도 냉전시대부터 공산권에서조차 자기들의 국호에까지 넣어 써 온 것이다. 역대 한국의 정당들이 가장 선호해서 써 온 당명도 '민주당'일 것이다. 모두 자기류의 민주를 한다는 것이니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함의(含意 connotation)는 그야말로 다양하고 또 내부적 모순까지 포함한 것일 터이다. 공산통치 방식도 민주라니 정말 민주주의를 아는 사람들이 모순과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의리'라 하면 전통적으로 “사람으로서,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인데 요즘은 마치 주먹 사회에서 전용어로 쓰고 있는 성싶다. 워낙 일반인들의 의리가 없어져 버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더 더욱 걱정이다. 이 단어에 다의로 존재하는 뜻들 중에 자주 쓰는 의미의 상호 순위가 바뀌면서 유학자의 용어가 깡패들의 용어처럼 들리게 된 말의 경우다.

‘명분'이란 말도 유가(儒家)의 정명(正名) 사상에서 내려와 "신분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도의상의 본분, 또는 표면상의 이유"라는 뜻이 있는데, 역시 정치판의 모리배들이 더 많이 애용하고 있다. 원래는 공자의 <논어 자로편>에 "명칭 곧 말의 개념을 바르게 한다"는 '정명'이란 윤리학적 용어가 나오는데 "명분에 상응하여 실질을 바르게 한다. 예컨대 부자(父子)에는 그 각각 신분에 어울리는 윤리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말의 개념을 살려 명분에 맞게 쓰는 일이 이 어지러운 세상을 조금이라도 맑게 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