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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미스터리: 초상화가, 월문 소재, 채색 석탑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10-21
조회
55
세 가지 미스터리: 초상화가, 월문 소재, 채색 석탑
여기 보이는 초상화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최근세실 초입에 전시되어 있는 이규상 (李圭祥 또는 이재윤 李載潤 1837-1917)의 영정인데 필자의 증조부요, 남산골 한옥 마을 이승업가를 1889년에 구입한 문화재 애호가다. (李承業은 경복궁 별전의 중건에 참여했을 도목수라고 집안에서 알려져 있는데, 아직 해체시 상량문 같은 데서 확인된 바는 없다.) 도편수가 직접 살기 위해 지은, 이 잘 지은 집을 골라서 산 혜안의 이규상은 소림 조석진 (小琳 趙錫晉), 심전 안중식 (心田 安中植), 관재 이도영 (貫齋 李道榮), 무호 이한복 (無號 李漢福) 등이 사랑방에 몇 주씩 기거하며 그림을 그리도록 패트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초상화는 이들 중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작품이라고 집안에 구전되고 있다. 그러나 심전의 다른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솜씨임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 심전의 부인이 어떤 때는 그림 값을 먼저 받아다 생활비로 썼다는 얘기도 조모를 통해 구전되고 있는 터라 심전이 관여됐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등받이에 호피가 그려져 있는 솜씨는 이당 김은호 (以堂 金殷鎬, 1892-1979)의 것으로 보일 듯도 하지만, 얼굴의 음영처리가 그의 솜씨를 뛰어 넘는다. [초상화 전문 조선미 교수의 감정 결과] 이당은 1912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조석진•안중식 등의 지도 아래 전통적인 중국 미인도 화보를 모사하거나 사생을 통해 그림공부를 했다. 그 해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명성을 얻어 당시의 세도가와 최 제우 등의 초상화를 그렸고 1913년 덕수궁 어전휘호회(御殿揮毫會)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2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화가에게 사진을 매개로 좀 뒤에 그리게 했다고 해야 시기가 겨우 맞는 정도다. 심전 혹은 이당, 어느 쪽일지 의문이다. 여하튼 소수의 상위계층 사람들만이 초상화를 남길 수 있었던 시기의 끝에서, ‘사진’의 보편화로 영생보존에 관한 평등이 실현될 시기 직전의 최종 걸작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작은 미스터리를 하나 더 삽입하자면, 소림과 심전의 스승인 오원 장승업 (吾園 張承業, 1843~1897)도 말년 4-50대에 이 집 사랑채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청계천에서 매맞은 얘기며 수표교 근처에서 머슴살이도 했었으니 이승업가가 있던 삼각동은 잘 알았을 인접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 (醉畵仙)을 찍을 때 남산골 한옥마을을 무대로 썼고 작업을 다 끝낸 뒤 뒤풀이로 바로 이 집(촬영 당시쯤은 옛날 찻집으로 개방되었음)에서 차를 나누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오원의 옛 인연이 후대의 예인들을 같은 터전으로 이끈 터라 여기에도 미스터리가 느껴진다. 임감독이 은연중 오원의 혼을 이 집에서 받아 좋은 영화를 찍었던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두 번째 미스터리는 남산골 한옥마을의 이승업가가 원래 중구 삼각동 36번지에 있을 때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화담(花墻)이 있었고 내외법을 지키는 유일한 통로로 월문(月門)이 있었다. 해방 직후 담은 일부 헐려져 있었으나, 1964년 그 집에서 우리가 나올 때까지도 건재했던 월문이 그 직후 어디론가 이전이 되어 현재까지도 소재를 알 수 없다. 우리 월문과 흡사한 것을 서도호 작가의 헝겊 작품에서 보았는데 똑같지는 않고, 사실 궁에 남아 있는 어느 월문보다도 아담하고 정교하다. 위 사진에서 왼쪽 벽면에 보이는 화려한 화문벽(花文甓)은 필자의 소시 적(1940년대)부터 헐어 떨어진 상태였었다. 이 글을 쓰는 큰 이유의 하나는 전국 어느 곳엔가 이전 되어 있을 이 도편수의 문화재를 널리 찾아 보자는 의도가 있다. 소재를 감지한 분들은 ‘이산 문화재 찾기’ 차원에서 중앙박물관(전화 0000000) 또는 sangoak2@gmail.com으로 알려 주시면 한다.
위 사진의 탑신 중앙부 4면에 둘러 부처상과 후광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청색 계열만 남아 있지만 채색이 전반적으로 되었던 흔적이 있다.
이 석탑은 1900년경 증조모님(이규상 부인)이 그 손자들이 잘 출생 성장하기를 기원하는 시주로 서울 은평구 진관사 경내에 설립한 것이다. 영아 사망률이 높고 아들도 귀해서 생긴 기복신앙인데, 그 덕에 손자만 여덟을 얻으셨다. 진관사는 6•25 후 앞쪽 연못 터를 메워 본전을 옮겼기에 이 탑은 현재 경내 가장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가면 현재는 흰돌로 보이는 건물 사진 위에 채색한 투명 비닐을 끼어 놓은 기념 책자를 판다. 고증된 근거에 의해 신전 석조물에 옛날에는 채색이 있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아마도 국내에서도 과거 어느 시기까지는 석조물에 채색을 했었던 전통이 있었을지 모른다. 바로 그 추정을 실증해 주는 구체적 증거가 이 탑이며 몇 세기를 지나서 백 여년 전에 그 관습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보탑’이라 이름이 새겨진 이 증거물은 한국미술사를 바꿀지 모를 거의 유일한 징표다. 필자가 채색 사실을 학계에 제보한 뒤 지난 20년 사이에도 나날이 보존 대책 없이 퇴색되어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쩌면 경주 다보탑 이음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채색의 흔적도 이런 무관심의 역사가 자초한 결과인지 모른다. 선입관을 버리고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지 고민해 보는 미술사가들의 지혜와 노고가 필요하다.
문화재에 관한 세 가지 미스터리를 같이 풀어 봤으면 하는 희망에서 이 글을 썼다.
서울대 인문대 명예교수 이상억 [본 원고에 달린 4개의 사진을 앨법에 넣기로 함.]
여기 보이는 초상화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최근세실 초입에 전시되어 있는 이규상 (李圭祥 또는 이재윤 李載潤 1837-1917)의 영정인데 필자의 증조부요, 남산골 한옥 마을 이승업가를 1889년에 구입한 문화재 애호가다. (李承業은 경복궁 별전의 중건에 참여했을 도목수라고 집안에서 알려져 있는데, 아직 해체시 상량문 같은 데서 확인된 바는 없다.) 도편수가 직접 살기 위해 지은, 이 잘 지은 집을 골라서 산 혜안의 이규상은 소림 조석진 (小琳 趙錫晉), 심전 안중식 (心田 安中植), 관재 이도영 (貫齋 李道榮), 무호 이한복 (無號 李漢福) 등이 사랑방에 몇 주씩 기거하며 그림을 그리도록 패트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초상화는 이들 중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작품이라고 집안에 구전되고 있다. 그러나 심전의 다른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솜씨임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 심전의 부인이 어떤 때는 그림 값을 먼저 받아다 생활비로 썼다는 얘기도 조모를 통해 구전되고 있는 터라 심전이 관여됐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등받이에 호피가 그려져 있는 솜씨는 이당 김은호 (以堂 金殷鎬, 1892-1979)의 것으로 보일 듯도 하지만, 얼굴의 음영처리가 그의 솜씨를 뛰어 넘는다. [초상화 전문 조선미 교수의 감정 결과] 이당은 1912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조석진•안중식 등의 지도 아래 전통적인 중국 미인도 화보를 모사하거나 사생을 통해 그림공부를 했다. 그 해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명성을 얻어 당시의 세도가와 최 제우 등의 초상화를 그렸고 1913년 덕수궁 어전휘호회(御殿揮毫會)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2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화가에게 사진을 매개로 좀 뒤에 그리게 했다고 해야 시기가 겨우 맞는 정도다. 심전 혹은 이당, 어느 쪽일지 의문이다. 여하튼 소수의 상위계층 사람들만이 초상화를 남길 수 있었던 시기의 끝에서, ‘사진’의 보편화로 영생보존에 관한 평등이 실현될 시기 직전의 최종 걸작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작은 미스터리를 하나 더 삽입하자면, 소림과 심전의 스승인 오원 장승업 (吾園 張承業, 1843~1897)도 말년 4-50대에 이 집 사랑채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청계천에서 매맞은 얘기며 수표교 근처에서 머슴살이도 했었으니 이승업가가 있던 삼각동은 잘 알았을 인접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 (醉畵仙)을 찍을 때 남산골 한옥마을을 무대로 썼고 작업을 다 끝낸 뒤 뒤풀이로 바로 이 집(촬영 당시쯤은 옛날 찻집으로 개방되었음)에서 차를 나누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오원의 옛 인연이 후대의 예인들을 같은 터전으로 이끈 터라 여기에도 미스터리가 느껴진다. 임감독이 은연중 오원의 혼을 이 집에서 받아 좋은 영화를 찍었던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두 번째 미스터리는 남산골 한옥마을의 이승업가가 원래 중구 삼각동 36번지에 있을 때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화담(花墻)이 있었고 내외법을 지키는 유일한 통로로 월문(月門)이 있었다. 해방 직후 담은 일부 헐려져 있었으나, 1964년 그 집에서 우리가 나올 때까지도 건재했던 월문이 그 직후 어디론가 이전이 되어 현재까지도 소재를 알 수 없다. 우리 월문과 흡사한 것을 서도호 작가의 헝겊 작품에서 보았는데 똑같지는 않고, 사실 궁에 남아 있는 어느 월문보다도 아담하고 정교하다. 위 사진에서 왼쪽 벽면에 보이는 화려한 화문벽(花文甓)은 필자의 소시 적(1940년대)부터 헐어 떨어진 상태였었다. 이 글을 쓰는 큰 이유의 하나는 전국 어느 곳엔가 이전 되어 있을 이 도편수의 문화재를 널리 찾아 보자는 의도가 있다. 소재를 감지한 분들은 ‘이산 문화재 찾기’ 차원에서 중앙박물관(전화 0000000) 또는 sangoak2@gmail.com으로 알려 주시면 한다.
위 사진의 탑신 중앙부 4면에 둘러 부처상과 후광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청색 계열만 남아 있지만 채색이 전반적으로 되었던 흔적이 있다.
이 석탑은 1900년경 증조모님(이규상 부인)이 그 손자들이 잘 출생 성장하기를 기원하는 시주로 서울 은평구 진관사 경내에 설립한 것이다. 영아 사망률이 높고 아들도 귀해서 생긴 기복신앙인데, 그 덕에 손자만 여덟을 얻으셨다. 진관사는 6•25 후 앞쪽 연못 터를 메워 본전을 옮겼기에 이 탑은 현재 경내 가장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가면 현재는 흰돌로 보이는 건물 사진 위에 채색한 투명 비닐을 끼어 놓은 기념 책자를 판다. 고증된 근거에 의해 신전 석조물에 옛날에는 채색이 있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아마도 국내에서도 과거 어느 시기까지는 석조물에 채색을 했었던 전통이 있었을지 모른다. 바로 그 추정을 실증해 주는 구체적 증거가 이 탑이며 몇 세기를 지나서 백 여년 전에 그 관습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보탑’이라 이름이 새겨진 이 증거물은 한국미술사를 바꿀지 모를 거의 유일한 징표다. 필자가 채색 사실을 학계에 제보한 뒤 지난 20년 사이에도 나날이 보존 대책 없이 퇴색되어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쩌면 경주 다보탑 이음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채색의 흔적도 이런 무관심의 역사가 자초한 결과인지 모른다. 선입관을 버리고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지 고민해 보는 미술사가들의 지혜와 노고가 필요하다.
문화재에 관한 세 가지 미스터리를 같이 풀어 봤으면 하는 희망에서 이 글을 썼다.
서울대 인문대 명예교수 이상억 [본 원고에 달린 4개의 사진을 앨법에 넣기로 함.]